데이비드 O. 러셀 감독. 아메리칸 허슬
작은 동네에서 춤을 추던 여자(에이미 아담스)가 있다. 몸에 걸친 옷의 면적이 아마 손바닥 정도 만했을까. 다 벗은 것보다 더 벗은 듯한 몸짓으로 이름 모를 사람들과 어둠 속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이렇게 살고 있다고. 흥분이 된 적도 있었다. 춤이란 그런 것이니까. 자신 또는 자신과 타인이 생성한 낯선 열기를 흐트러 뜨리는 일. 매번 같은 웨이브가 아니라면 그때그때에 맞는 느낌을 따라가야 하는 일. 하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원해서 선택한 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시드니는 자신이 이 일로 평생 먹고살려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짐을 싸고 도시로 왔다. 코스모폴리탄 매거진에 지원했고 능력을 인정받으며 안정적 지위로 다가갔다. 세상이 바닥이라 부르는 곳에서부터 길들여진 근성이 그녀의 명민한 두뇌와 감각과 맞물려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다. 공허함. 좀 더 세련된 사람들과 체계적인 업무에 둘러싸인다고 해소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새 다른 것을 갈망하고 있었고, 그 갈망을 해갈해줄 남자와 마주친다.
맹꽁이 배와 파뿌리 같은 머리숱을 가진 채 거드름을 피우는 남자, 어빙(크리스천 베일)을.
어떤 수작이었을까. 음악 코드가 맞는 순간, 사랑에 빠졌다. 서로의 어둠에서 공통분모를 발견하고 세탁소 옷더미 안에서 원을 그리며 돌았다. 왜 당신을 이제야 만났나요 라고 말하며 떠날 줄 모르는 눈빛과 눈빛. 남자도 여자도 서로가 서로에게 마지막 퍼즐 조각임을 직감했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세상의 단둘이었다. 사랑의 필요조건이라면 무장해제이다. 솔직하게 된다. 자신을 낱낱이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어빙은 자신의 업을 밝힌다. 사기꾼. 돈이 급한 이들의 간절함을 십분 활용해 돈을 뜯는 범죄였다. 시드니는 고민하지 않는다. 영민한 전략가로서 기꺼이 합류한다. 그리고 둘은 승승장구한다. 사기계의 거목이 된다. 상체의 절반을 드러내는 시드니의 옷차림은 지친 남자 고객들의 혼을 빼놓는데 유용했다. 애간장을 태우다가 마지못해 승낙하고 계약이 성사되면 사기는 완료되었다. 어느 날 매력적인 외모의 남자가 고객으로 찾아온다. 시드니의 마음을 녹이고 어빙의 눈에 불을 지른 남자.
꿈이 큰 FBI 요원, 디마소(브래들리 쿠퍼)
시드니가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을 맡게 되는 순간이었다. 코스모폴리탄이 빌딩 숲의 시민권을 발급해주고, 어빙과의 사랑이 결여된 감정을 채워주었다면, 디마소는 기본이 갖춰진 상태의 인간으로서 완전한 로맨스를 이뤄줄 남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야심의 크기와는 달리 소박한 환경에 처해있던 디마소는 승진에 눈이 멀어 있었다. 시드니는 매력적이었지만 동물적 욕망을 채우고 싶은 대상에 불과했다. 우선순위는 아니었다. 그 사이 어빙은 혼란을 겪고 둘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른다. 디마소의 등장과 함께 관계는 도형이 되고 사기의 판은 커진다. 셋은 개인이 아닌 시스템을 상대하기로 합의한다. 고위공무원, 정치인, 범죄조직 소탕까지 한 번에.
시드니는 점점 멍들고 지쳐가고 있었다. 어빙이 유부남이었다는 둘째 치더라도 자신이 연인이 아닌 또 한 명의 피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시드니를 점점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부인과 아이 있는 남자와의 사랑에 미래가 있을까. 처음 만났던 순간의 격렬했던 화학작용은 진짜였다 치더라도 현재는 그때와 달랐다. 시드니는 의지를 가진 여자였다.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기 싫었다. 어빙과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디마소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디마소가 화장실로 끌고 가 몸을 탐하려던 순간에도 그녀는 찰나의 욕정에 자신의 순애보를 지켰다. 남자를 진정시키고 완전한 타이밍을 기다리자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설득했다. 잘 풀리고 있다고 여겼겠지만,
사랑도 사기도 판은 꼬여가고 있었다.
어빙의 부인(제니퍼 로렌스)과 사기의 성공을 위한 핵심 호구(제레미 레너)의 등장이 아니더라도 시드니는 충분히 복잡했다. 꼬인 끈은 어빙의 머리숱처럼 주체를 할 수 없어지고, 디마소의 야망도 천장을 뚫고 있었다.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찾아오고, 서로는 서로를 신뢰하기 힘든 지경에까지 이른다. 변수와 변수가 속출하고, 시드니는 특유의 냉철함을 유지하면서도 너무 멀리 왔음을 알게 된다. 윈도처럼 복구 지점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는 더 이상 사랑도 사기도 팽창과 과속을 줄여나가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인다. 멈춰야 했다. 그리고 회복해야 했다.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자신을 포함한 더 많은 이들이 다칠 뿐이었다.
시드니로 분한 에이미 아담스는 주연 중 인지도가 가장 낮은 편에 속하는 배우였다. 다크 나이트의 크리스천 베일, 헝거 게임의 제니퍼 로렌스, 어벤저스의 제레미 레너, 행오버의 브래들리 쿠퍼보다 결코 흥행 스코어가 높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로지 카메라 앞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로 보일 수 있도록 한 여자의 인생을 삼켜버린다. 시드니가 되어 인생 전체를 표정과 몸, 대사로 증명한다. 세월의 때를 겪으며 살이 덕지덕지 붙은 팔뚝이, 눈가에 드리우는 주름과 그늘이, 이미 가진 것을 잃을까 조바심 내는 초조함과 새로운 욕망을 겁 없이 받아들이는 결기가 공존하고 있었다. 데이비드 O. 러셀 감독의 각본과 대니 엘프만의 음악과 어우러져 138분 동안 작두를 타고 있었다. 앞으로의 여우주연상 트로피와 할리우드판의 날고기는 시나리오는 오로지 나의 것이라고 선언하듯, 그야말로 사기 캐릭터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