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そして父になる
역할은 잔혹하다. 인간은 애초 뭐가 될 계획이 없었다. 탄생의 이유와 시기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다. 혼란기를 겪어야 했고, 평생 그 혼란이 끝나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과거의 이들이 이미 정해놓은 방식대로 살아가게 된다. 같은 방향으로 걷고 같은 학습과정을 거친다. 그렇게 비슷해지고 나이 듦에 따라 거기에 맞다고 사회가 규정한 역할을 부여받는다.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공장 컨테이너 벨트 위의 TV처럼 조립된다. 스무 살이 넘는다고 크게 달라지지도 않는다. 수명이 다할 때까지 인간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다. 선택할 겨를도 없이 받아들여야 하고 준비할 시간도 없이 수많은 다음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탄생도 과정도 죽음도 규칙과 기준이라는 타인들의 정의에 따라야 한다.
아버지라는 역할은 어떠한가. 바깥공기에 처음 자신을 내던져질 때, 어머니의 몸속에서 꺼내어져 피투성이 몸으로 응애 하고 우는 게 아이고 난 이제 앞으로 아버지가 될 운명이구나 라는 의미는 아닐 텐데. 처음이다. 태어나 처음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그러하듯, 남자라는 개체들의 생 역시 불안 투성이다. 숨기라고 배웠지만 자신과 닮은 아이 앞에서 조차 완전히 숨기기란 불가능하다. 아이들은 자꾸, 왜?라고 묻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한 질문에도 답하지 못한 어른이라는 이름의 미숙한 인간이 아이라는 거대한 존재에게 수많은 근원들에 대한 정해지지 않은 답을, 아직 자신조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추궁당한다. 취조당한다. 웃는 낯으로 끊임없는 곤혹스러움과 마주해야 한다.
료카(후쿠야마 마사하루)는 회피했다. 케이타(니노미야 케이타)가 자기 아이라고 믿었을 때도, 그게 아니라는 사실과 마주했을 때도 료카의 아이에 대한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건조하고 냉담했으며 사무적이었다. 아버지라는 직급을 달고 돈을 벌고 시간을 조금 투여하는 수준이었다. 마치 프로젝트처럼 굴었다. 그걸, 아버지보다 세상이 더 낯설 수밖에 없는 아이가 모를 리 없다. 아버지의 벽을 아이는 뚫지도 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아버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버지의 등만, 아버지의 차가운 표정만. 고층 아파트도 럭셔리 세단도 필요 없는 아이였는데. 그저 허물없는 웃음과 키를 낮추고 놀아주는 모습이 필요했는데. 그렇게 아버지 료카와 아들 케이타는 거리를 좁히지 못했다.
등장 첫 장면부터 아이보다 더 아이처럼 굴며 아이들과 뒹굴던 유다이(릴리 프랭키)와 달랐다. 유다이와 료카가 다른 건 단순히 아이들과 잘 놀아준다의 정도가 아니었다. 성인 남자로서 사회적 지위를 가르는 성취의 정도가 달랐다. 유다이는 료카가 가진 경제력이 없었다. 비싼 차, 높은 아파트, 세련된 양복, 정돈된 헤어스타일 등, 흔히들 자본과 가문으로 일컬어지는 것들로 이룰 수 있는 조건들이 비교적 빈약했다. 아이를 기르는 환경의 차이로까지 이를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비슷했다. 아이들에겐 어른들의 경제력이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했다. 장난감을 고쳐주고 연을 날리러 같이 가주는 아버지가 필요했을 뿐, 아이들에겐 높은 직급의 부자 어른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료카는 몰랐다. 부정했다. 그리고 서툴렀다. 아이에게 아버지란 어른이 처음 이듯, 료카에게도 케이타 같은 아이가 인생 처음이었다. 오랫동안 모르고 지냈다. 케이타가 자신을 그렇게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자신이 어릴 적 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을 알게 된 순간, 료카의 눈물이 터진다. 아버지가 되는 순간이었다. 아이가 가르쳐 준, 그렇게 아버지가 되는 순간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은 아이를 기르는 과정에도 거대하게 작용한다. 부자 아버지가 행복한 아이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온 가정과 온 사회를 지배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영화 초반 지저분한 얼굴에 허름한 차림의 유다이와 말끔한 얼굴과 세련된 차림의 료카를 보며 료카 같은 아버지가 -아이에게 더 많은 물건을 사주고 그걸로 아이를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거기에- 더 좋은 아버지일 거라고 끄덕거렸다. 돈으로 만들어주는 행복을 신뢰했다. 그게 아직 사회화되지 않은 아이에게도 작용할 거라고. 그래서 료카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료카는 표현방식이 서툰 거지 진심은 다를 거라고. 예측은 조금 빗나갔다. 료카는 정말 몰랐다. 가진 것과 알고 있는 것에만 의지하고 있었다. 시야가 좁았다. 그 좁은 시야로 아이가 원하는 세상을 보여주기 어려웠다. 유다이는 달랐다. 허리를 굽히고 옷을 구기며 아이의 세상에 들어가 있었다. 료카라는 아버지와 유다이라는 아버지는 선택지였다. 두 개의 답을 쓰고 싶지만 현실세계에서는 녹록하지 않은.
아버지이든 아이든 역할이 주어질 때, 인간은 한계와 만난다. 한계를 넘어도 다음 한계에 다다르고 끊임없이 성취해도 또 다른 내외부의 요구와 기준이 달려든다. 결국, 영영 완벽에 이르지 못한다. 완벽한 아버지도 완벽한 아이도 되지 못한 채 속절없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 숙명에 시달린다. 여러 가지를 포기한다면 여러 가지 역할을 부여받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게 가능할 정도로 인간은 용감하지 못하다. 도망갈 수 없다. 생물학적 죽음에 이르기도 전에 사회적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감당하기에 인간은 나약하다. 받아들여야 한다. 역할을, 아버지라는 역할을. 그리고 연습해야 한다. 끊임없이, 서로에게 연결된 생명이 끊어질 때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은 얼마나 비겁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유효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은 아무것에도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고 고레다와 히레카즈 감독은 말하고 있었다. 조금 더 나은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아이를 가진 남자들에게 영화 같은 엄청난 사건이 동시에 닥치는 일은 드물지만, 그렇게 조금 더 나은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