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중독, 사랑 영화가 아니다

김대우 감독. 인간중독

by 백승권

사랑 영화가 아니다. 월남전에 관한 영화다. 또는 월남전이 사랑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야기이거나, 참전군인은 어떻게 사랑을 다루게 되는가에 대한 영화적 대답이기도 하다. 부하들을 잃은 남자와 부모를 잃은 여자의 이야기기도 하지만, 곱씹으며 내린 결론이라면 인간중독은 사랑 영화가 아니라는 점이다. 차라리 전쟁이 어디까지 인간과 세계의 삶을 어떻게 붕괴시키나에 대한 영화여야 한다. 적어도 사랑이 이런 식으로 다뤄져서는 안 된다.


김대우 감독의 전작들, 음란서생이 그랬고, 방자전이 그랬다. 두 사랑 이야기를 통해 김대우 감독은, 사랑은 그 고결한 지고지순에도 불구하고 결국 한쪽을 완전히 끝낸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러한 비극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옳음’에 대해 긍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중독은 달랐다. 인간중독은 사랑이 아닌 중독이라는 기능장애 증세의 과정과 결말을 그리고 있었다. 한쪽이 기적 같은 치료제 역할을 하다가 급사를 일으키는 맹독으로 변질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낯선 감정이 오가는 금기의 관계란 얼마나 매혹적인가. 금기의 선 위에 선 남녀가 떨어지지 않으려 서로를 보듬는 광경은 얼마나 스릴 있는가. 파멸하는 단계만을 남겨두고 그전까지 육체와 정신을 모조리 태워버릴 듯한 절정의 순간은 얼마나 위태로운가. 만나지 말았어야 될 관계는 애석하게도 전제부터 통제 불가능의 영역일 뿐이다.


피와 상처에 아랑곳하지 않는 여자 가흔(임지연)을 본 순간 월남전에서 겪은 생지옥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진평(송승헌)은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 알게 된다. 군인이 지켜야 할 명예와 인간이 돌봐야 할 의리의 기준이 송두리째 뒤흔들린다. 부하 경우진(온주완)의 아내이자, 아내 이숙진(조여정)의 지인이라는 인간사회의 기준은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늦게 붙은 불은 꺼지지 않는다. 느린 대화로 시소게임을 하던 그들은 각자 인생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찾은 듯 서로를 뜨겁게 끼워 맞춘다. 각자의 아내와 남편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기행을 즐기고 공유한다.


그렇게 첫사랑이 불륜이 된 여자 가흔은, 진평과의 관계를 늘 불안해했다. 자신은 지금 남편이 아닌 남편의 엄마, 자신의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분을 배반하고 있었다. 어린 날 어미의 시체 곁에서 칠일 밤낮을 지냈던 여자에게 생존은 사랑이란 불길보다 더 간절한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진평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불안함을 사랑했지만 그녀가 사랑한 건 어쩌면 진평이 아닌 불안함 그 자체였다. 자신을 현재에서 벗어나게 할 도구로서 그를 가까이 한 듯 보였다. 늘 거리를 두었다.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위태로운 운명. 진평과의 차이였다. 진평은 다 버릴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자신을 치유할 수 만 있다면. 둘의 차이였다.


진평이 가흔에게 진통제였다면, 가흔은 진통제에게 깁스 같은 존재 같았다. 불편과 불안을 자초했지만, 월남전의 트라우마에 깁스가 둘러싸인 순간, 진평은 그 깁스를 자신의 새로운 피부로 인식했다. 흡착시켰고 떼지 않으려 했다. 차라리 죽으려 했다. 친구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꾸 술을 들이켰다. 자신에겐 가흔이 있으니 죽어도 나을 거라는 믿음을 장착한 듯했다. 하지만 가흔은 거리를 더 이상 좁히지 않았다. 몸이 몇 번 붙었다고 마음까지 그렇게 놔둘 순 없었다. 순진한 얼굴과 목소리로 진평을 거절했다. 진평의 통증이 다시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마침 사회적 지위의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고, 그날 저녁 진평은 만인 앞에서 자신을 발가벗긴다. 분노를 드러내고 모두의 이야깃거리로 전락한다. 이로 인해 모두와 모든 것을 잃는다. 도박이었다. 올인.


진평은 애초 죽어가고 있었고 그 죽음을 늦추려 가흔에게 의지했었다. 하지만 거절당했고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지만 애초 같은 대답이었을 뿐이었다. 가슴을 쥐어짜며 호소해도 가흔은 미동하지 않았다. 진평은 그제야 자신이 모든 것을 걸었음에도 어떤 통증도 막지 못함을 깨닫는다. 그렇게 마지막 주사기를 꺼내 가흔 앞에서 자신의 심장에 꽂아버린다. 나머지 이야기는 필요 없다. 육체의 훼손 상태야 어찌 되었든 진평은 이미 거기서 끝났다. 중독의 마지막 단계였다. 더 이상 중독 증세를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


세상의 비난을 무릅쓰고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내의 이야기. 제레미 아이언스와 줄리엣 비노쉬의 <데미지>가 떠올랐다. 수컷들은 종종 자신이 사랑이라 믿는 행위를 유지하려 어떤 부끄러움도 감내한다. 지금까지의 학습된 기준을 모조리 무너뜨리고 충동과 광기에 모든 걸 맡긴다. 그리고 감당한다. 이것이 종종 기존 관계와 생명의 완전한 죽음에 이르기도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과정의 쾌감에 빠져 모든 안전장치를 고장 내버린다. 이미 죽은 것이다. 다시 태어났다는 착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기의 극을 보여준다. 자신이 원하다 해도 상대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경우의 수를 망각한다. 이게 정상일 리 없다. 하지만 자신은 괜찮다고 여긴다. 그래서 생명의 불꽃을 잠재우고 착각 속에 영원히 잠든다. 지금껏 살아온 자신의 세상 속에서 자신이 남길 수 있는 가장 깊은 화인만을 남기면서. 다시 말하지만, 인간중독은 사랑 영화가 아니다. 감당도 못하는 인간들이 결정한 전쟁이란 참극 속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여자라도 남자가 겪은 전쟁의 고통을 치유할 수 없다. 남자를 죽여서 고통과 함께 소멸시킬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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