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성보 감독. 해무
궁지에 몰린 인간은 진짜 자신이 누군지 드러낸다. 가면을 쓰고 있던 과거에서 벗어난다. 1998년 한국이 그러했다. 전 세계에 공식적으로 나라가 경제적인 위기를 겪고 있음을 천명했고, 국민들은 나라의 위기를 개인의 위기로 체감하며 하루하루를 버텨갔다. 바다 위도 마찬가지였다. 궁핍해진 사람들에게 풍랑은 더욱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만선의 꿈에 부푼 표정과 손길로 어렵게 배를 띄워도 빈손으로 들어와야 했다. 물고기 대신 사람이라도 잡아야 할 처지였다. 그렇게 다시 배를 띄웠다. 살기 위해서. 살기 위해 건너온 사람들을 살기 위해서 실어 나르기로 한다.
처음 해본 일이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선장(김윤석)의 결정이란 그런 절박함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선원 모두를, 선원 모두의 가족들의 밥그릇까지도 선장은 고민하고 결정해야 했다. 그렇게 짝퉁 금시계를 차고 배를 띄웠다.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잡으러. 날씨는 궂었지만 모두 갈아탈 수 있었다. 보따리를 지고 이름 모를 배로 자신을 던져야 했던 사람들의 심정 또한 오죽했을까. 아마 전진호의 선원들보다 덜하진 않았으리라. 모두 목숨이 달려있었고 그래서 불안한 표정을 숨기며 자신을 설득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숨겨지지 않았다. 표정은 드러나고 욕망은 피어올랐으며 섞여 있는 사람들끼리 쇄도 섞으려 어두운 지하로 데려가려 했다. 생존을 위해서 어떤 대가까지 치러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짐승의 기운이 배 위를 감돌고 있었다. 먹고 먹히고 죽고 죽이려는.
여자는 금지된 생명이었다. 배 위에 오르면 재수 없다고 그랬다. 수컷들의 두려움이 약자를 향해 표출되고 있었다. 험한 일에 대한 책임감과 자부심이 엮여 있었을까. 전진호의 여자(한예리)는 오른 순간부터 수컷들의 표적이 되었다. 애어른 가릴 거 없이 그녀의 손목을 휘어잡으려 침을 흘렸다. 성욕을 채우려는 수컷과 동정과 연민을 가진 수컷에 둘러싸여 여자는 몸을 떨었다. 그러던 중 위기가 닥쳤다. 모두가 몸을 숨겨야 하는 위기. 물고기 있을 곳에 사람을 쳐 넣었다. 몸을 썩게 하는 악취가 진동하는 곳이었다. 살기 위해 버텨야 된다고 윽박질렀다. 죽지 않으려 조금은 죽어도 된다는 논리이기도 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고 아무도 올라오지 못했다.
살기 위해서 버려야 했다. 모두가 자기가 그런 인간인 줄 몰랐을 것이다. 살기 위해 남의 팔다리를 끊어서 바다에 던지는 인간이라는 것을. 공동 작업이라는 점에서 위안을 얻었다. 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다. 이게 다 우리 식구 먹이자고 하는 짓이다. 같이 하는 거니까 만약에 걸려도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죽이려고 한 것도 아니잖아. 등등. 그렇게 컵라면에 물을 부어주며 허기를 채워주던 이들의 몸을 도끼와 칼로 찍어 분리했다. 익숙해지니 쉬웠다.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의 몸뚱이에 칼집을 낸다는 게 처음엔 무서웠지만 스스로를 설득하고 나니 괜찮아졌다.
그렇게 서로를 죽이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살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 한둘 더 죽인다고 해서 내 손에 묻은 피가 닦여질 리 만무했다. 목적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고기를 잡던 배는 사람의 살점을 뜯는 배가 되었고, 고기를 잡던 선원들은 사람의 살점을 가르는 살인자가 되어 있었다. 한 명이 죽으면 내 몫이 늘어나고 한 명이 죽으면 그의 지위가 내 지위가 되고 있었다. 욕정이 그치지 않고 여자는 쫓기고 있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도망갈 곳이 없었다. 바다는 죽음이었다. 배는 지옥이었다. 균열된 관계에서 뿜어 나온 핏물처럼, 균열된 배에서 바닷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전진호와 함께 모두의 운명이 가라앉고 있었다. 이따금 경제적 지위가 약한 이들의 범죄는 정황이 좀 더 면밀히 파악되고 그로 인해 일부분 면죄의 여지도 있지 않을까 고려되던 때가 있었다. 돈이 죄지 사람이 죄냐 라는 말이 설득력 있기도 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르다. 상황이 결정하는 게 인간의 행동이라면, 인간에겐 이미 그러한 본능이 다들 적재되어 있는 것 아니냐고. 도시인이 죽는 것과 어부가 죽는 것의 목숨 값이 다른가. 그들이 생존을 위해 남을 짓누르고 죽이는 행위가 얼마나 다를까. 그걸 단순히 돈이 없어서 저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인간은 애초 생존을 위해선 남을 죽일 수 있는 거라고 조상들이 물려준 DNA를 품고 있는 것 아닐까.
선의만큼 무너지기 쉬운 것도 없다. 명분은 얼마나 거창한가. 가족을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한 배에 탄 나의 선원들을 위해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나의 명분이 개인의 명분을 해치고 남의 미래를 해치고 남의 가족을 해치는 걸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의 선의가 남의 선의를 살육하는 것을 얼마나 묵과하고 있는 것일까. 모두가 폐선의 선원이고 모두가 고기 대신 사람을 잡고 있으며 모두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고 모두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는 상황과 다르지 않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 그 지옥에서 살아남았다 한들 다시는 떠올리기 싫어 도망쳐야 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해무는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해무는 실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