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핀처 감독. 나를 찾아줘
길리어 플린의 원작 소설은 모른다.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는, 결혼에 처한 개인들과 결혼을 문제로 바라보는 언론들과 타인의 결혼을 소비하는 대중들을 다루고 있었다. 이전 영화(소셜 네트워크)에서는 인류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 어느 하버드생의 전 여친에 대한 복수 과정을 그리더니 이번 영화에서는 어느 하버드 출신 여성이 현 남편을 어떻게 다루는 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두 편 다 하버드라는 배경은 스토리와 캐릭터 이해에 진하게 작용하고 있다. 감독의 악취미랄까. 지성인들의 비이성적 태도를 다루기를 즐기는 듯하다.
<나를 찾아줘>가 그리는 결혼 이전의 날들, 사랑이 시작되는 시기는 운명과 낭만이 뒤섞여 황홀할 지경이다. 회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윤색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여겨질 정도다. 모두가 겪는 불행을 비껴가고 싶었지만 끝내 어떤 불행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에 있어 보편적 결혼 '생활'을 실감하는 이들의 공감을 확보한다. 물리적 간격의 틈이 없을 정도로 밀착되었지만, 심리적 거리는 양극단으로 멀어져 간다. 인내는 한계에 이르고 높은 억양과 거센 몸짓이 서로를 다치게 한다. 어느 날, 여자는 사라진다.
남자(벤 에플렉)를 제외한 모두가 여자(로자먼드 파이크)를 찾는다. 모든 정황과 증거들이 남자를 여자를 사라지게 한 가장 큰 이유로 몰아가고 있었다. 여자의 실종은 세상의 사건이 되고 남자는 TV에 등장하게 되며 동정과 비난의 대상이 된다. 모두가 둘의 결혼을 파헤치고 씹고 먹게 된다. 진실의 조각들은 흩어져 있었고, 조립된다 한들 완성된 그림을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실종은 각자의 관점으로 재구성되고 있었고, 자신의 관점에 부합하냐가 가장 중요했다. 실종 기간이 늘고 추정이 길어질수록 사건은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실종 사건은 자체의 생명력으로 자신만의 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살해 가능성과 외도 사실, 근거를 확인하기 힘든 폭로와 커져가는 의심이 얽혀 희생의 제물을 찾고 있었다. 사람들은 조급해했다. 자신들의 결혼과 현실에선 이뤄지기 힘든 드라마를 원했다. 드라마를 보며 욕하고 연민에 휩싸이며 희열을 느끼고 자극을 받기 원했다. 언론은 이런 심리에 부흥하려 억측과 과장을 수반하며 채널을 고정시키려 애썼다. 타인의 결혼을 해체시키고 우주 최고의 문젯거리로 만들며 한쪽을 악마로 몰아세워 자신의 현실을 위안했다.
언론과 대중이 사이비 종교의식 같은 행태로 타인의 결혼과 실종사건을 다루는 동안 내부의 진실은 이와 상관없이 피칠갑의 궤도로 휘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관여되는 사람은 늘어갔지만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자기 먼저 살려는 두뇌게임 중이었다. 이미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사라진 건 여자만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 사랑이 그 이전에 신뢰가 그 이전에 관계가 관심이 자취를 감췄고 영영 회복될 수 없는 상태로 소멸되어 가고 있었다. 진실을 노출한다고 누가 이로울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건 거짓말이었다. 거짓말이 사회와 개인과 대중의 사이를 긴밀하게 연결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원하는 거짓말을 들으며 끄덕거리고 의외의 거짓말을 들으며 열렬히 환호했다. 말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얼마나 더 문제화되느냐가 가장 중요했다. 문제가 커질수록 카메라와 마이크는 많아지고 시청률은 올라갔으며 기회를 얻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이 사건의 끝을 보고 싶어 할까. 미디어 속의 결혼은 자신의 현실에서 잠시 공감을 얻다가 타인의 지옥으로 끝나는 구경거리에 불과했다.
그 결혼의 당사자들은 미디어가 만든 지옥과 자신들이 저지른 지옥을 넘나들며 현세의 무간도를 경험하고 있었다. 악인은 한쪽만이 아니었다. 균형은 앞으로도 이루기 힘들 것이다. 사는 내내 대가를 치르고 거울을 보며 과거의 결정들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길리어 플린이 글로 쓰고 데이비드 핀처가 영상으로 그린 결혼의 서슬 퍼런 단면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알 길이 없고 결혼한 사람은 더더욱 모를 욕망과 상상력이 결합된 기이한 감옥의 도면이었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둘이 처음 만나는 장면이었다. 여자는 다른 남자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