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 죽을 수 있지만 죽을 수 없는 것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인터스텔라

by 백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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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대학교 3학년 때 교수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10초쯤 뜸 들인 내 대답은 이랬다. 죽을 수 있지만 죽을 수 없는 것. 교수의 표정은 혼란스러웠다. 단답형을 예상했으리라. 별다른 피드백을 주지 않았다.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로 이어졌다. 아무도 그 답에 대한 배경에 대해 묻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 답을 한 게 아니니까. 당시 그 당혹스러운 찰나에 진심과 열의를 다해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사랑에 빠져 있었다. 지금처럼. 그래서 대상을 위해 죽을 수 있지만, 내가 사라지는 순간, 사라진 만큼 대상에게는 결여가 생긴다고 판단했다. 그런 식으로 대상에게 피해를 입히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죽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저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죽을 수 있지만 죽을 수 없는 것. 그러했다.


인터스텔라는 사랑 영화다.


사랑을 적극적으로 다뤘다. 가장 미지의 공간을 배경으로, 가장 진화된 이론을 가시화시키며 3시간여를 꽉꽉 채웠다. 아직 한 번 밖에 안 봐서 완전한 이해를 했다고 장담하긴 이르다. 인셉션 역시 세 번째 감상을 넘겼을 때 인물과 설정, 구조에 대해 80% 이상 납득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인셉션 역시 사랑을 다뤘다. 부자의 사랑, 부부의 사랑(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마리온 코띠아르). 다크 나이트는 조커(히스 레저)와 배트맨(크리스천 베일)의 애증을 다뤘다. 역시 사랑이다. 인터스텔라의 사랑은 어린 여자와 나이 든 남자다. 딸과 아빠. 인터스텔라는 딸(제시카 차스테인)과 아빠(매튜 매커너히)의 사랑을 다루기 위해 인류의 목숨과 우주, 블랙홀과 웜홀, 행성과 중력, 물리학과 나사를 동원한다. 인류가 인류의 생성 이전에 것들을 발견하고 해석하는 모든 시도와 노력을 더해도, 딸과 아빠가 서로를 원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들렸다. 사랑이 아니라면 우주와 인류의 멸망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고.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모든 저항을 기꺼이 넘어설 수 있다고.


딸의 목숨을 위협하는 미래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아빠는 우주선에 오른다. 딸은 원하지 않았다. 아빠를 믿지만 아빠의 운명마저 베팅할 순 없었다. 아빠는 약속했지만 명민한 딸은 약속의 한계를 알았다. 약속은 그저 인질이라고. 약속의 주체가 사라지는 순간, 인질의 효용 역시 무의미하다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까닭을 설명할 수 없는 아빠는 등을 돌린다. 가속페달을 밟는다. 눈물을 흘린다. 멀어질수록 딸과 아빠의 중력은 강해졌지만, 당시 둘이 느끼는 중력은 아무것도 해결해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빠는 무지와 무능을 해결하기 위해 지구를 떠나기로 했고, 떠나는 곳과 도달하는 곳 사이에 서로 다른 시간의 기준을 모두 감당하기로 했다. 그 결과 딸은 지구에서 훨씬 빨리 늙어갔다. 아빠의 1시간은 딸의 7년이었다. 이게 관객들에게 적용되었다면 엔딩 크레딧이 흐르는 동안 내 나이는 50을 돌파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빠의 표현은 눈물뿐이었다. 시간이 없었다. 아빠는 생각이 도달하기 전에 먼저 움직여야 했다. 딸을 구하기 위해서. 딸이 속해 있는 행성을 지키기 위해서.


여기까지만 보면, 마치 사랑을 대하는 인간의 의지가 딸을 생각하는 아빠를 우주로 날려 보낸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인간의 의지는 위대하지 않냐고. 아니. 영화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읽혔다. 인간의 의지는 우주를 굴러가게 하는 힘의 작용 없이는 어떤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었다. 그게 없다면 인간도 딸도 아빠도 사랑도 모두 무의미했다. 존재 가치가 인지조차 될 수 없었다. 그 중심에 놓인 힘을 알아채는 것이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인간의 의무였다. 놓친다면 절멸이었다. 힘을 다룰 수 있어야, 원하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었다. 차원을 돌파할 수 있었다.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먼저 떠난 자들이 영영 깨어나지 않고, 우주선이 폭발하고, 황량한 행성 위에서 몸싸움을 하고, 인간이 지닌 가장 간절한 욕망을 악용하며, 타인이 품은 과거의 깊은 사랑 또한 져버렸다. 잔혹한 결기를 앞세워야 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이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희생시키며 자신 또한 그 희생 리스트에 집어넣어야 했다. 딸을 살려야 했으니까. 단순했다. 이 모든 게 아빠의 딸을 위한 거대한 도박이었다.


이를 위해 죽을 수 있지만, 죽을 수 없었다.

아빠는 끝내 자신이 수단으로써 모든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가장 강력하게 절감하고 있었으니까. 지금껏 지나온 모든 경험과 쌓아온 지식의 총량을 쏟아붓는 것에도 모자라 마치 신만이 다룰 수 있을 듯한 우주 공간의 변수까지 모조리, 그리고 마땅히 감당하기로 한다. 이게 자신이 세상에 던져진 이유고 생명이 멈출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할 절대적 임무인 것처럼.


그동안 딸은 뭐했나. 음주 운전하지 마 공익광고처럼 아빠 언제와 하고 턱이나 괴고 있었을까.


딸은 딸대로 바쁘고 간절했다. 중년이 될 때까지 함흥차사인 아빠에게 화가 났다. 증오에 몸부림치며 진한 눈물을 흘릴 정도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고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한다. 연결점을 찾는다. 아빠와 딸, 딸과 아빠, 석연치 않았던 어린 시절의 장면들, 매듭이 풀어지는 과정들, 집에서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여정, 모든 것을 우연이란 조각으로 치부하기엔 설계자의 냄새가 진했다. 의도가 가미된 걸까. 누구? 신? 외계인? 맨 인 블랙? 딸도 아빠도 과학자였다. 그들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는 방법은 없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지 않은 것이라 믿는 부류였다. 딸은 적극적으로 아빠를 찾는다. 작용하기 시작한다. 딸과 아빠 사이의 중력이 다시, 서로를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차원을 넘어, 우주를 지나, 블랙홀을 뚫고, 시간을 건너, 인간과 인간의 의지를 연결하고 있었다. 지구에서 멀어지지 않는 달처럼, 서로의 주기를 이탈하지 않는 거대한 질서를 품은 태양계처럼, 생성과 폭발 속에서 자신을 무한히 확장하며 존재가 기준과 질서 자체가 되어버린 우주처럼, 둘은 어느 것 하나 단언할 수 없는 불균형의 지옥 안에서 틈새를 찾아내 교감하고 소통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선은 눈에 보이는 단서들이 되었고, 한없이 차갑고도 놀랍도록 뜨거운 지성은 서로를 발견하는 매개체가 되었으며 이는 서로에게 달랐던 시간의 개념을 무너뜨리고도 서로를 생존시키는 기적을 낳았다.


딸이란 행성과 아빠란 행성이 서로의 차원을 교차시키며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이들에게 가능과 불가능은 얼마나 연약한 구분일까.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 격렬한 욕망만이 대기와 무중력의 영역을 넘어 뜨겁게 포효하고 있었다. 인간은 결국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는 상황에서야 상황을 초월할 수 있는 진정한 추진력을 얻게 되는 것일까. 세계가 그토록 잔혹한 고문을 가해야만 인간이 살아남고 사랑을 쟁취할 수 있는 걸까. 수 억 쌍의 아빠와 딸 중 하나인 그들은 단 한 명의 구함으로써 자신들의 세상을 구하고 결국 모두의 세상을 구했다. 대의가 아닌, 지극히 이기적인 욕망에서 시작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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