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증, 느린 자살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 갈증

by 백승권

살기 위해 무리를 이룰 수밖에 없었던 인간은

살기 위해 서로에게 역할과 지위를 부여하고

그에 걸맞게 살아가길 요구한다.

남자의 몸에서 태어난 여자를 딸이라 부르고

딸은 자신에게 피부와 혈관을 제공한

남자를 아버지라 부르고

여자의 무리에 속한 이들은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고

선생의 앞에 모인 어린아이들을 학생이라 부르고

학생은 자신들 앞에 놓인 어른을 선생이라 부르고

이름을 붙여주고 서로를 구분한다.

매번 똑같이 부르며 매번 다른 역할을 강요하고

매번 다른 상황에 처하게 한 뒤 자멸로 치닫는다.

심지어 타인을 죽이면 자신도 죽을 거라는

두려움마저 거세한다.

끝이 없다. 서로를 같은 이름으로 부르던 인간은

서로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세상 모든 것을 증오하고 모든 구성원에게

살의를 퍼붓는다.

남편은 부인을 죽이고

부인은 남편을 죽이고 그걸 본

딸은 아버지를 죽이고

딸을 욕망하던 아버지는 딸을 죽이고

친구는 친구를 죽이고

친구가 죽은 후 여자는 세상을 모두 죽이고

어른은 아이를 죽이고 다시

아이는 어른을 죽이기 위해 아이를 죽이고 그런

아이를 어른의 어른들이 죽이고 그런

아이의 어른들을 어른들이 죽이고 그런

아이를 죽이기 위해 그런

소녀를 죽이기 위해 그런

세상을 죽이기 위해 그런

모두를 죽이기 위해 그런

누군가의 세상은 완전히 끝나버렸고 그

끝난 세상 속에서 모두를 끝장내려 했고 그

모두를 죽이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지우고 그

자신을 완전한 욕망의 대상으로 바꿔버리고 그 후

자신을 욕망하는 모두를 복수의 제물로 바꿔버린다.

악은 악행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악행 자체가 의미가 된다.

살인 역시 그러하여, 살인 자체가

유흥으로 돌변하고

이를 방해하는 모두가 유흥의 도구가 된다.

늙은 인간이 어린 소녀들을

육체적으로 탐하는 것에서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모두를 죽이고 인간 영혼 전체를 리셋한다고 해도

인간은 다시 무리를 지으며

서로 다른 우주를 설계하고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욕망을 탐하며

서로의 영역이 서로의 영역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질서를 지닌

세계를 구축하게 될 테니까.

그걸 깨려는 순간, 살이 잘리고,

뼈가 부러지고 피가 튀는 것이다.

쓰레기가 쓰레기를 낳고 그 쓰레기가 다시 세상을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그 쓰레기장 속에서

쓰레기는 다시

쓰레기를 찾고 다른 쓰레기를 죽이고,

쓰레기는 그렇게 늘어만 간다.

삽질을 한다고 구원은 오지 않는다.

증오는 증오의 과거로 되돌리지 못하고

누구도 누구를 용서하지 못한다.

아이가 단순히 악마의 씨였다면

세상은 얼마나 이해하기 쉬운 대상이었을까.

이미 태어난

악마들이 세상 속에서 판치고 있었고

아이는 적응하기 위해 세상이 이미 정한 방식 중

하나를 택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상대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말을 해주고 그렇게

상대의 모든 삶을 파멸시키는 것.

아이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참극은

아이가 다시 자신이 없었던 세상으로 되돌리기 위한

길고 지난한 자살의 과정은 아니었을까.

세상이 자신의 숨통을 끊을 때까지

세상의 혈관을 하나하나 잘랐던 건 아닐까.

그렇게 가학과 피칠갑의 춤을 추다가

관객 중 하나가 자신을 죽였을 때

소녀가 이룬 궁극의 목적은

성취된 것이 아니었을까.

모든 것은 조롱의 대상

모든 것은 몰이해의 지옥

모든 것은 꿈보다 못한 해몽

모든 것은 어른인 척하는 괴물들의 분비물

자신을 세상에서 지우기 위해

모두를 세상 밖으로 버려놓는다.

인간이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인간인척 하며 살아가는 모두에게

서로를 죽이는 것 외에는 어떤

목적도 없어 보이는 모두에게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인간들에게

아이는 악마를 자처하고

모두를 비웃으며 눈 속에서 산화한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너무 늦었고

우리는 이미 처음부터 잘못 맺어진

사람들일 거라고 조소하며

앞으로도 삽질을 멈추지 않을 인간들에게

아이(고마츠 나나)는 영화는

감독(나카시마 테츠야)은 열렬히 빠큐를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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