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쉬, 내가 드러머였다면

위플래쉬

by 백승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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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스스로를 부정하며 성장하려는 걸까. 그렇게 미지의 지점에 도달하는 것에 가치를 둘까. 왜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나. 영영 성숙할 수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나. 한계 안에서 유영하고 그 한계를 자신의 임계점이 아닌 그저 최대치이자 유일한 깨달음이며 어리석은 남들이 도저히 알아차리지 못한 영역이기에 이걸 먼저 안 자신에게 신의 권능을 부여한다.


모든 개인이 탁월한 도덕률을 지닐 필요는 없다. 아니 오히려 눈 깜빡하지 않고 잔혹할 정도로 남을 짓밟을 수 있는 자들만이 일정 지위에 올라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위플래시는 두 개의 관점으로 볼 수 있는 영화다. 최고가 되고 싶은 자와 자신을 최고라고 믿는 자. 학생(마일즈 텔러)과 선생(J.K 시몬스)으로 나뉜다. 입장이 다르다. 목적이 같아 보이지만 그것도 아니다. 전자는 자신의 재능을 노력으로 가공해 최고의 실력과 이에 수반되는 명성을 얻고 싶어 하고 후자는 자신의 안목과 교육 철학으로 최고의 인재를 배출하고 싶어 한다. 천재적인 뮤지션과 천재적인 교육가의 차이랄까. 처음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드러머는 갖은 모욕을 감당하며 손마디가 부서질세라 연습을 멈추지 않고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학생을 만나지 못한 지휘자는 드럼을 집어던지며 더더더 다그친다.


기준이란 무엇일까. 지휘자에겐 신봉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지휘자가 드러머가 맘에 들지 않아 심벌을 날렸고 충격받은 드러머는 이후 연습을 통해 최고의 드러머가 되어 찬사를 받았다는 것. 그는 물리적 정신적 충격을 안겨서라도 최고로 훈육하는 자가 되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 자신의 현재 방식을 포기하지 않았다. 맘에 안 들면 윽박지르고 오장육부를 송두리째 뒤집어 자극하며 덩치 큰 사내들을 울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는 이후 자살자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탓이라 믿고 싶어 하지 않았겠지, 그의 입장에서 죽은 자는 중도탈락자였다.


드러머는 젊었다. 타협보다 직접 부딪쳤고, 끝내 부러졌다. 트럭에 치여 나뒹굴던 차에서 나와 피투성이가 된 채 공연장으로 달렸고, 쇼크상태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스틱을 잡았다. 그리고 그 무대 위에서 지휘자의 멱살을 잡았다. 마치 빅뱅 같은 세계와 세계의 충돌이었다. 이후 지휘자는 지위를 잃고 드러머는 스틱을 놓았지만 그들은 다시 만났고 최악의 복수와 경악스러운 만회를 한시 한무대에서 펼친다. 폭력을 통한 존중이었을까. 둘은 웃는다. 하지만 그건 화해가 아니었다. 각자가 원한 것을 얻은 자들의 자위 같은 웃음이었다.


이런 영화를 보고 누군가는, 그래 저런 강한 지도자가 있어야 엄청난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지. 그래 바로 저럴 수밖에 없어. 이럴지도 모르겠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엄청난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저렇게 매번 엄청난 심리적 압박과 모멸감을 안기고 볼이 터지도록 싸대기를 갈기고 기물을 파손하며 폭력을 쏟아붓는다면 아마 마른 수건에 물 짜내듯 뭔가 나와도 나오긴 할 것이다. 그리고 소멸되겠지. 주체는 사라질 것이다. 그것을 바라는 이들에게는 '결과적으로 올바른' 방식일 테다. 노예의 뼈와 살이 부서지든 말든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만 제대로 쌓아 올리면 되지 않겠어? 같은 마인드. 그런 방식으로 지금까지의 현대문명이 건축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누군가들의 방식일지도. 하지만 최소한 나는 아니다.


내가 드러머였다면 들고 있던 스틱을 윽박지르는 지휘자의 목구멍에 쑤셔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피를 토해내며 죽는 모습을 천천히 바라보았을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여정에서 만날 수 있는 거대한 장벽이자 그걸 넘는 순간 온갖 판타지가 실현될 거라 여길 수 있는 시절이지만, 금방 알게 되겠지. 인생은 일방통행이 아니라는 것을. 선택지는 하나가 아니라는 것도. 지휘자의 폭력성이 드러머의 폭력성을 이끌어내고 그 두 개의 폭력성이 만나 천재적인 시너지로 폭발시켰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런 해석은 너무 슬프다. 저런 것을 견뎌내야 모두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 탄생되는 건가? 그게 맞다면 나는 포기하겠다. 지휘자를 죽이고 스틱을 꺾을 것이다. 그에게 상처받은 모두를 불러내어 시신을 훼손하게 만들 것이다. 위플래시는 천재가 생성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은유적으로 칭송하는 영화가 아니었다. 저런 방식으로 탄생한 자들에 대한 시끄러운 비웃음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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