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프랭크 감독. 퀸스 갬빗
천재는 태어난다고 믿는다. 길러질 수 없다고. 그게 더 이해가 쉬워서. 납득하고 합리화하기 편하니까. 씨앗부터 다르다고 여기는 게 편하다. 비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테니. 대다수의 인류는 극소수의 천재와 천재성에 열광한다. 대리만족. 관심 분야에서의 탁월한 성취, 실력, 퍼포먼스, 기적 같은 기록들. 공감보다 분리가 편하다. 그 의자에 내가 앉았다면 천재로 추앙받을 일은 없었을 거라고 여기는 게 낫다. 하지만 지속적인 팬심을 유지하려면 감정적인 연결이 필요하다. 착시나 착각이라도 상관없다. 동경하는 천재에게 (억지로라도) 인간미를 부여해야 한다. 같은 개수의 눈코귀와 팔다리? 이건 무리다. 그럼 인종과 성별? 중요한 요소지만 영역이 좀 넓다. 어린 시절은 어떨까? 특히 일반적인(그래서 더 중요하여 여겨지는) 조건이 몇 가지 결여된 어린 시절, 이를 테면 부모의 이른 부재 같은 것.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가난, 외로움, 고립감, 끔찍한 장면들 같은 것. 비로소 천재가 좀 더 가깝게 여겨진다. 말을 붙이긴 어려울 테지만 적어도 나 그 사람을 조금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천재가 허구의 대상이더라도. 그래서 더 환상적이고 그래서 더 열광하게 된다. 존재하지 않았던 천재에 대한 강렬한 선망. 비인간적인 능력의 그늘에 숨겨진, 한없이 인간적인 태초의 불행에 대하여.
베스 하먼(안야 테일러 조이)은 고아다. 어린 날, 아빠가 떠났고 엄마가 죽었다. 엄마는 죽기 전 풀기 힘든 문제를 동승한 어린 딸에게 고백한다. 문제는 베스였다. 베스를 혼자 힘으로 제대로 키울 수 없는 것, 감당할 수 없는 것, 그게 엄마의 문제였다. 엄마의 해결책은 문제를 포기하는 거였다. 떠난 아빠에게 이 문제를 같이 풀자고 매달렸지만 그는 정류장을 한참 지나친 버스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베스 엄마의 남편이자, 베스의 아빠이길 포기하고 새로운 가족을 택했다. 단정 지어 한쪽을 비난하기 힘든 부부 문제. 육아는 자처한 지옥이었다. 홀로 남은 베스는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이 입양을 기다리는 기관으로 보내진다. "너희가 여기 있는 건 너희 부모가 어떤 선택을 했기 때문이야." 거기서 베스는 인생의 새판을 짠다. 스스로의 힘으로 말을 옮기는 법을 발견한다. 그 새로운 판 위에서 모든 것을 컨트롤하고 자신이 최고 권력자가 되기로 한다.
베스의 체스 실력은 지하 창고에서 발굴된다. 체스를 사랑하는 건물 관리인 샤이벨(빌 캠프)이 심지에 불을 붙인다. 불을 꺼뜨리지 않은 건 베스 자신이었다. 생애 최초 인정받은 분야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안정제에 취해 몽롱한 환영 속에서 베스는 체스판을 펼치고 '환상'의 경기를 펼친다. 누적된 환상들로 천재성을 완성해 나간다. 베스는 단숨에 미국을 재패하고 파리와 모스크바를 초토화시킨다. 적수가 없었다. "제가 여자란 말만 많아요.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오직 남성들로만 득실대던 체스 왕국에서 베스는 초반에 여성으로 주목받았고 이후 실력으로 끊임없이 트로피를 수집한다.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미국과 냉전 중이었던 소련을 대표하는 그랜드 마스터라도. 베스가 나타나기 전 판을 지배했던 모든 남성들은 그녀의 실력 앞에서 모두 패배를 인정한다. 예를 갖추고 악수를 청하고 고개를 숙인다. 만인의 갈채가 쏟아진다. 베스는 생을 뒤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오직 체스뿐이었고, 체스와 상관없다면 아무 관심 없었다. 베스는 자신과 삶을 완전히 체스판과 말에 빙의시킨다. 분리는 불가능했다. 두 번 다시 고립될 수 없었으니까. 두 번째 엄마가 죽고 두 번째 (쓰레기 같은) 아빠가 떠나도 베스는 자신의 길을 간다. 에티켓 미소 없이. 오직 재능과 실력과 연구와 연습으로만. 이런 스토리엔 늘 헌신적인 조력자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모두 베스가 체스 천재였기에 가능했다. "가난뱅이 백인 소녀의 표준" 같은 베스에게는 오직 체스뿐이었다. 시작이자 전부였다.
베스를 천재로 완성한 게 환상이라면 베스에게 인간미를 부여한 건 회상이었다. 주로 엄마와의 기억, 차 안에서의 마지막 대화, 자신에게 건네던 말들, 엄마가 갑자기 사라질까 봐 두려움에 떨던 순간, 그게 아이에게 얼마나 거대하고 극심한 공포였을지 이해하는 어른들이 베스에겐 없었다. 세상의 전부가 사라지는 기분, 그리고 절망한 엄마의 선택에 의해, 자동차는 완파되고 엄마라는 물리적 세상이 현실에서 사라진다. 이후 베스는 혼자였다. 남은 생 내내 엄마의 기억이 난입했다. 엄마는 최초의 세상이었으니까. 기억을 잃지 않는 이상 떼어낼 수 없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물어볼 수 없었다. 과거의 엄마를 기억해낼수록 혼자인 현재가 부각되었다. 얼마나 많은 순간 부모와 어른의 존재가 절실했을까. 베스의 냉철한 태도와 공격적인 체스 플레이는 선택지 없는 선택이었다. 상대에게 어떤 기대도 바라지 않고 동시에 자신의 어떤 틈도 허용하지 않는 것. 엄마가 그랬으니까. 자신에게 의사를 묻지 않고 동반 죽음으로 돌진했으니까. 이후의 모든 삶의 격돌에서 베스는 차선책을 두지 않는다. 아빠 같은 적들로 가득한 판 위에서 엄마처럼 기권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