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 적이 대화의 소재가 될 때

by 백승권

지나온 시간의 일부를 고통과 괴로움으로 정의하는 건 이따금 쓸모가 있다. 물론 그 미래의 쓸모까지 기획하며 타인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안겨달라고 부탁할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고통과 괴로움의 타이밍이 조금 달랐을 뿐 공급의 원천이 하나로 귀결된다는 건 흥미롭다. 이런 흥미로움은 같은 시간대와 공간을 지나온 자들이 흩어졌다 다시 만났을 때 구심점이 된다. 잠시 같이 앉게 하는 중력이 된다. 지나온 일부의 고통과 괴로움의 쓸모란 이런 것이다. 대화의 소재가 된다는 것.


모든 대화가 재판은 아니다. 증거와 증인을 대동할 필요는 없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진실들. 지금 듣고 있는 저 이야기들이 사실과 다르다고 의심하지 않는다. 저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뢰를 담보한다. 이런 소재는 한정판이니까. 경험한 극소수에게만 지식과 정보로 남아있으니까. 먼 과거에 대한 회상 같지만 알아서 영상과 보이스가 플레이된다. 그래, 지독해. 이걸 다시 학습할 줄이야. 한 사람에게 지독한 존재가 다른 모두에게 지독할 수 있다는, 경험으로 익힌 지식. 이럴 때 공감대는 마케팅 목적을 적은 페이지에서 빠져나와 일상의 순간을 정의하는 단어가 된다. 지옥의 괴물을 상대한 자들은 지옥과 괴물을 기억한다.


소모적이다. 피로감도 있다. 스스로의 지난 생을 부정하는 행위기도 하고 왜 우린 이렇게 뒤늦게 빛의 주변에서 지나온 그늘을 이야기할까. 한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이 없다면 아직까지도 이름도 붙이지 못한 이 통증에 대해 말 한번 꺼내지 못하고 무덤에 들어갈지도 모르니까. 관 속에 가만히 누워 아... 이 이야기는 좀 하고 중간계를 떠났다면 지금보다 덜 억울할 텐데...라는 심정이 들 수도 있으니까. 나의 고통이 나만의 것이라는 외로움에서 아 조금 더 듣고 보니 나만의 외로움이 아니라 우리의 비슷한 고통과 괴로움이겠구나. 그렇게 말할 수도 인식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있겠구나. 이런 소모 이 정도의 피로감 이 정도의 부정도 없다면 삶은 더 갉아먹힐 수도 있었겠지. 서로 다른 문으로 입장했을 뿐 우린 비슷한 고통의 미로에서 구역질을 하며 겨우 출구로 빠져나온 거였어.


헐리웃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한 동그랗게 앉아 자기 이야기를 하는 모임과는 조금 다르다. 불특정 다수에게 어둠을 발설하며 치부를 들키지 않아도 되니까. 쥐불놀이나 불꽃놀이 같은 것. 몇 년에 한 번 공터나 작은 해변의 밤에 우연히 모여 심지에 불을 붙이고 펑, 삐유우우 하는 발사 소리를 듣고 불꽃의 궤적을 지켜보고 고막을 파파팡 때리는 굉음에 화들짝 놀라는 것. 연기가 사라지고 별이 지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각자의 온 길로 되돌아가지만 그때만큼은 같은 소재에 대해 집중하며 악마를 화형에 처하고 지옥을 무너뜨리는 공상에 빠지는 것.


90살이 되어도 반복할지도 모르지. 운전면허 적성검사처럼. 복수, 저주, 증오, 이걸 뭐라고 부르던 굳이 평화롭게 매듭지을 필요는 없다는 여운도 남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면 각자와 공동의 삶에서 과거를 떠올리며 이야기할만한 자격 정도는 있으니까. 우리가 킬러의 전화번호를 찾거나 국민청원을 작성하거나 대자보를 써서 광장에 붙이지는 않을 거니까. 공공의 적은 박제 되어 영영 소환될 것이다. 그때마다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긴 대화의 소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