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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Apr 28. 2024

딸의 얼굴을 떼어 자기 얼굴에 붙인 마녀에 대하여

이충걸 장편소설. 너의 얼굴

그 말을 들었던 9월처럼 고독했던 때도 없었다.


나는 하도 운이 없어서

나 자체가 징크스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예쁜 애를 니가 낳았을 리가 없어.”


나는 내 몸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딸에게서 육체적 균형을 찾으려는

진화생물학적 의무감이 있었다.


그놈의 경도, 그놈의 천착.


“예술가의 조건이 뭔지 아니?

지구력이야. 르누아르는 4천 점도 넘게 그렸어.”


“작가로서 너에 대해 얘기해 봐”

그런 질문은 죽을 때까지 적용될 것이다.


그들은 항상 제 뜻대로 안 되는 미술판에 화를 내면서

분노에 뒤따르는 자기들의 예술적 순박함을 과시했다.


파라가 없으면 지구가 돌아가지 않았다.


참깨 라면에 달걀이라도 얹어주면

내가 산수를 푸는 반려견이라도 되는 양

칭찬해 주었다.


삶 전체를 저돌성으로 무장한 시기에는

어떤 환란도 막을 자신이 있겠지.


나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이건 해도 되고, 저건 해도 안된다고 윽박지르는

도그마 속에서 자랐다. 나더러 뭔가를 강요한

사람들도 그들의 부모와,

그 부모의 부모가 하라는 걸 하며

살았을 테니까.


자세히 묻지 않았다. 비밀은 나도 있으니까.


위대한 사람도 뒷마당에는 고아가 울고 있어.


나는 파라의 얼굴이었던 내 얼굴을 만졌다.


나는 그냥 뼈 위에 올려둔 두꺼운 장갑과 같았다.


아우슈비츠 정원은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수년에 걸쳐 만들었다.

살해당할 날을 기다리며

정원을 만드는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딸 없이 혼자 사는 무명 화가입니다’


우리는 함께 늙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내가 딸의 얼굴을 떼어

자기 얼굴에 붙인 마녀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책을 덮고 며칠이 지났다. 읽는 동안 발췌를 했고 발췌를 하며 탄성과 박장대소, 낮은 한숨이 오갔다. (구획으로 나뉜 산업을 장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소설은 내게 영화만큼 다채로운 감흥을 주는 장르는 아니다. 감정 전이와 이입, 동일시의 겹과 너비가 달라서. 전에는 이 차이를 분명히 주장할 수 있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내게도 딸이 있으니까. 전 지큐 코리아 편집장 (그는 모든 미디어가 매번 언급하는 이 명찰이 조금은 지겨울지도 모른다) 이충걸 작가의 첫 장편소설 <너의 얼굴>은 딸과 엄마, 여성과 여성, 삶과 삶, 그 사이의 우주를 대화로 연결하고 여백을 회상으로 뒤덮는다. 행복한 기억은 있어도 현재는 그렇지 않다. 어쩌면 행복한 무늬로 가득한 회상도 현재 당장 죽지 않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 비극을 표백하기 위해 가공된 환상일지도 모른다. 딸과 엄마가 서로 다른 사고로 서로 다른 병실에 누워 있고 둘 다 높은 확률로 생물학적 죽음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칼을 든 주치의는 선언한다. 딸은 죽었고 엄마는 거의 죽었지만 단 하나의 가능성이 남았다고. 딸과 엄마가 하나가 되면 된다고. 딸의 얼굴과 엄마의 나머지 신체가 하나가 되면 된다고. 레고 조립 같이 재료가 디자인을 갖춘 새로운 형상이 되는 과정이 아니다. 차라리 물리면 2초 만에 심장까지 독이 침투해 즉사시키는 뱀과 인간의 마지막 대립과 비슷해 보였다. 사후세계에 가져간 이승의 기억을 해체시켜 가장 버리고 싶은 것과 가장 가져가고 싶은 것을 분류하는 과정 같기도 했다. 문제는 둘의 합이 엄마라는 화자에게 딸이라는 점이었다. 딸은 (엄마의) 미래의 얼굴이 된다. 엄마는 (딸의) 새로운 근육과 뼈가 된다. 둘은 새로운 원본이 되어 앞으로 펼쳐질 천국과 지옥을 같이 걸어 나가게 될 것이다. 프리즘 같은 잔상들. 책을 덮고 며칠이 더 지난 후 리뷰했다면 아마 완전히 다른 문장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난 여전히 <너의 얼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너의 얼굴>은 420페이지 안에 다양한 얼굴을 지녔다. 사고로 얼굴을 잃은 여성이 사고로 생명을 잃은 딸의 얼굴과 합체하는 이야기, 점액질로 뒤덮인 거머리 같은 남성을 생에서 도려내지 못했지만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과 만나게 된 이야기, 딸의 남자친구를 은밀히 욕망하다가 남은 생을 죽은 딸의 얼굴로 살아가야 하는 형벌을 받은 여성의 이야기, 모든 지혜를 총동원해 단명을 재촉하지 말라던 보호자의 열변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오토바이를 타다가 한 종족이 붕괴와 파멸에 이르는 이야기, 엄마이기 앞서 화가이자 여성이었던 한 인간의 자조와 염세에 대한 고해성사, 입체적 지성과 겸양, 철학적 면모를 갖춘 젊은 남성을 충혈된 영혼으로 탐닉하며 관찰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딸과 엄마의 티키타카를 읽는 동안 많이 웃었다. 그 대가로 두 여성은 자신의 얼굴을 잃어야 했지만. (죽음보다 나을 리 없는 생존을 택해야 했을 상황 속에서) 주인공은 복잡한 심연을 지녔지만 당면한 상황에 순응할 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뇌를 연쇄 폭발시키며 내질렀을 내적 비명 소리를 이미지로 구체화한다면 온통 핏물과 잘린 근육, 턱선을 따라 그어졌을 점선과 분리되어 너덜거리는 안면... 기괴하고 끔찍하고 참담하다. (분리된 상태였던) 그들의 과거 지인이 (하나가 된) 그들의 현재와 마주했을 때의 확장된 동공과 뒤섞이고 뒤집힌 기억 회로는 차마 가늠하기도 힘들다. 기예르모 델토로(나이트메어 엘리), 소노 시온(차가운 열대어), 미이케 다카시(이치 더 킬러), 줄리아 뒤쿠르노(로어, 티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플라이), 페드로 알모도바르(내가 사는 피부)가 그려냈던 영상 언어들이 떠올랐다. 떠오를 뿐 완전히 다르다. 태양의 흑점과도 같은 (이미지적) 교집합, 아무도 지구 표면에서 자신의 안구만으로 태양의 흑점을 셀 수 없다. 난 이런 생경한 융합을 다른 이야기에서 감지한 적 없다. <너의 얼굴>은 가장 새롭고 다른 얼굴이며 오랫동안 재해석될 설정과 여지를 겹겹이 두르고 있다.


거울을 보며 혼잣말하는 모든 순간, 다시 살아난 딸이 이미 죽은 엄마에게 말하는 듯한 기분일까. 평생 대화하고 싶고 칭찬받고 싶던 사람의 얼굴을 지닌 채 살아야 하는 건 형벌일까 천운일까. 딸의 얼굴을 가지게 된 여성이 딸의 얼굴을 한 채 딸의 남자친구와 어떤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을까. (딸의 남자친구가 나이 들었을 때 딸의 생물학적 아비였던 자처럼 기생수 같은 크리쳐가 될까. 그렇다면 이건 끝나지 않을 뫼비우스의 악몽일까. 차라리 그렇다면 얼마나 천국 같은 결론일까. 딸은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았고 엄마는 찰과상만 입은 채 퇴원할 수 있다면, 오토바이는 탄 적도 없고 남자친구는 존재한 적 없었다면... 물론 환상통 같은 가정일 뿐이다.) 그들이 죽은 여자친구와 죽은 딸의 얼굴을 사이에 두고 금기를 해체하는 카니발까지 도달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그저 억측일까. 그들은 생명연장을 위해 선택한 안면이식이 자신들의 복잡한 이기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죄책감을 언제까지 즐길 수 있을까.


엄마에게 딸은 생성부터 개화까지 완전한 세계다. 무덤 속 어떤 예술가가 뛰쳐나온다 해도 이런 피조물은 감히 스케치조차 마칠 수 없을 만큼 비견할 수 없던 파라. 그런 파라를 다시 오려내어 엄마의 죽은 얼굴 위에 뒤덮어 가장 낯설고 새로운 형태의 조각상이 되어 군중 속으로 사라지기로 한다. 화가는 엄마와 딸이라는 가장 가까운 색료로 어디에도 공개된 적 없는 작품을 그려내고 싶었을까. 학계에 보고하며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고 싶은 어느 의사의 간교한 계략에 휘말린 걸까. 이렇게 합리화와 음모론을 총동원해야 진정할 수 있을까. 엄마는 딸의 얼굴을 볼 때마다 딸의 이름을 부를 텐데 그때마다 엄마 자신은 그만큼 희미해질까. 다 지워지면 완전히 딸이 될까. 그때는 엄마의 딸일까, 딸의 엄마일까. 책을 덮고 수일이 지났지만 <너의 얼굴>을 뜯어낼 수 없다. <너의 얼굴>은 일상과 기억을 낯설게 만드는 새로운 안면으로 이식될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은 <너의 얼굴> 본문 중 일부를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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