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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Jan 27. 2024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소중한 아이들아,

모르는 사람이나 테러리스트가

너희를 해치거나 죽일까 봐 너무 걱정하지 말렴.

통계로 보나 다른 무엇으로 보나

너희에게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너희 가족이니까.


이전의 독서는 문장을 수집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펜을 꺼내 줄을 치거나 페이지 한쪽을 접거나 하다가 최근에는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두고 나중에 다 읽으면 사진에 담긴 문장을 옮겨 적었다. 최근에 가장 많은 발췌를 한 책은 캐시 박 홍의 에세이 '마이너 필링스'(https://brunch.co.kr/@sk0279/1237)였다. 애초 읽으며 찍어둔 문장은 훨씬 많았으나 옮겨 쓰는 과정에서 많이 걸러졌다. 반면에 시선을 멈추는 문장이 너무, 너무도 많아서 찍지도 옮기지도 못하는 책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앤드루 솔로몬의 '부모와 다른 아이들'이 그랬다. 도로시 어릴 적에 재우고 새벽 늦은 시간까지 읽었고 '한낮의 우울'에 이어 더 엄청난 사례들과 거기서 오는 충격으로 문장을 수집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탓에 수집하다가 읽기의 흐름이 끊겨서 관둬야 했다. 앞서 언급한 책들은 제한시간과 해피엔딩이 합의된 영화와 드라마로 익숙해진 사고방식을 박살 내버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 더 추가하게 되었다. 소련 하르키우(현재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서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한 작가 마리아 투마킨의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출생지와 이주 국가를 앞서 적은 이유는 거의 모든 페이지에 서술되는 인물과 사건들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맨 처음에 적은 저 위의 문장 외에는 어떤 문장도 제대로 옮겨 적을 수 없었다. 아마 그래야 했다면 거의 모든 페이지를 여기에 필사해야 했을 것이다.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모든 페이지에 걸쳐 적나라하게 적힌 고통의 수가 페이지의 수와 비슷한 것도 아니다. 모든 페이지에 적힌 모든 글자와 행간과 자간과 마침표와 쉼표와 작은따옴표와 큰 따옴표와 말줄임표의 수를 서로 모조리 곱한 수보다 더 많은 고통이 이 책에 끓어 넘치고 있다. 자살한 10대와 학대당한 10대와 버림받은 10대와 의지할 곳 없는 10대와 겉으론 괜찮아 보였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던 10대의 죽음과 고통과 일기가 있었다. 발각되면 즉각 죽음보다 못한 모욕과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을 수 있다는 공포로 구덩이 속에 숨어야 했던 부모자녀와 이들이 서로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어떻게 죽음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묘사와 부모의 두려움으로 세상을 기억해야 했던 이들의 -생존자라 불리는 것도 정확하지 않은(그 불분명한 정의로 원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증언이 있었다.


절박한 처지에 놓인 누군가를 도와주려 할 때 (과감하고 단호하게) 자신의 삶 전부를 온전히 쏟아부을 게 아니라면 적당히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구실로 접근한다면 처음부터 그러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거라는 검증된 사례와 분석이 있었다. 순식간에 휘발되는 도움을 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다시 도움을 요청했을 때 거절할 경우 (피해자들이) 죽거나 다치거나 영영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자기만족을 위해 타인을 적당히 돕는 행위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대부분 가장 교묘하고 악랄한 가해자는 가족(특히 부모 세대)이었다. 서로를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집단도 가족이었으며 그러면서도 가장 오랜 기간 가장 가까이에서 온갖 비극과 극단적 상황을 공유하는 이들도 가족이었다.


작가 마리아 투마킨은 범죄와 법정, 거침없이 헌신하는 자들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한 처지에 놓인 자들, 이미 목숨을 잃은 자들의 흔적과 기록을 따라가며 사건과 진실, 상념과 대화를 이어 붙인다. 가장 낯선 방식으로 연결되고 분절된 각 케이스와 챕터들은 사건의 충격과 한없이 긴밀한 문장들의 힘과 감정의 묘사를 통해 가장 설득력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이전에 없었던 드라마틱한 완결성을 갖춘다. 서둘러 잊히고 외면당한 세계에서 여전히 죽어가고 소멸되는 인물들에 대한 오해와 현재, 그리고 아무리 애를 써도 나아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어디선가 그 사이에서 조금 더 견딜 만한 지옥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자들의 헌신을 알린다. 무엇보다 절망적인 상황을 단숨에 해소할 수 있는 해결책은 기존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수없이 확인한다. 그리고 사건과 재판, 미디어로 알려진 그 많은 뉴스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맥락과 내막들이 너무 많으며 이로 인해 대중들에게 전달되는 건 너무 한정적(오히려 진실과 다른)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진실은 의외의 부분에 있고 서둘러 결론을 내버린 이상 대중들이 그 진실을 마주할 기회는 매우 까마득할 거라는 비관과 함께.


전쟁의 희생자들, 자살의 가족력, 대를 잇는 비극과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고립감, 또는 모두가 제발 입을 다물었으면 하는 난도질 같은 억측들. 가까운 너무 일상과 가까이에 있는 영영 지워지지 않는 낙인 같은 절망들, 위로의 범주를 비웃으며 치솟는 피해와 중독의 표정들, 모든 여백이 고통으로 가득했지만 저자는 고통은 말해질 수 없는 일이라고 그랬다. 다시 읽는다면 더 세부적인 (더 많이 발견된) 고통을 무력하게 목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피해자들은 부축이 아닌 자립이 필요하다. 위로가 아닌 구명밧줄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부분 너무 늦었다. 작가는 숨겨졌던(아니면 대다수가 알고 싶지 않았던) 세계의 고통을 리뷰하고 있었고 이러한 고통이 드러나며 전시되는 일은 아무리 의도가 공익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고통받는 당사자의 주변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후속조치조차 될 수 없다. 이 책은 다음 죽음을 막지 못한다. 지금도 끊임없는 죽음과 더한 고통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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