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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May 24. 2024

침묵, 메모, 101번째 카피

한없이 집중하다 보면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가면 한없이 멈추고 싶어 진다. 한없이 아무것도 하고 싶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음악도 멈추고 영화도 미루게 된다. 이게 가능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건 드문 행운이다. 대부분 머릿속은 늘 시끄럽고 분주하고 얽혀있다. 폭력과 미스터리, 불안과 두려움이 서로를 분쇄하고 불태운다. 이럴 때 침묵과 고요만 한 안정제가 없다. 느슨해지고 느려지고 가라앉다가 무거워지고 조금 따스해진다. 다 타고 남은 재가 품고 있는 온기 같다. 파도를 하나 지나고 이 글을 쓴다. 예상하지 못한 일로 시간에 쫓기고 제대로 뚜렷해지지 않는 과정을 지나고 홀로 작업하고 쓰고 고치고 받아들이고 의견을 나누고 듣고 말하고 파일을 넘기고 기다리고 고치고 다시 확실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돌아온다. 다음 주에도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쓴 문장들을 만인이 오가는 곳에 걸어둘지 말지 결정하는 일에 참여할 것이다. 난처한 상황을 직면하는 일은 여전히 낯설고 어렵다. 그렇게 내 해석이 쇼핑몰 꼭대기에 걸릴 수 있다면 수백만 명이 지나는 벽을 도배할 수 있다면 아무도 저걸 쓴 자가 나인지 모르지만 내가 그걸 알고 있다면 저 문장의 첫 독자가 나였다는 걸, 그러면 아직은 기꺼이 감내할 수 있다. 100개를 써서 101번째 카피가 오케이 되는 작은 쾌감을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하며 계속 쓸 수 있다. 근사한 이미지가 입혀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래서 영화 카피를 고민할 때가 영예로웠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제임스 카메론, 리들리 스콧, 마틴 맥도나 등의 거장들의 작품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 때. 요즘은 카피라이팅 수업을 준비 중이다. 수명이 4시간 밖에 남지 않았고 그 시간 내에 카피라이터, 카피라이팅에 대해 알려줘야 한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간극을 얼마나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기절하지 않고 침묵과 고요의 시간을 세다가 어느덧 주변이 시끄러워진다. 여기까지 쓴다. 이런 메모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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