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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Jul 12. 2024

여기가 집이야, 화란

김창훈 감독. 화란

자기 연민이 학습인지 본능인지 모르겠다. 치건(송중기)은 그걸 죽음으로 배웠다. 애비가 시킨 일로 한번 죽었고 가장 가까이 있던 애비는 그 일을 아얘 몰랐다. 치건을 살린 건 낚시 바늘이었다. 그 생명의 낚시 바늘이 치건의 삶 전체를 찢어놓아도 치건은 도망갈 수 없었다. 치건은 죽는 순간까지 이 삶이 자신의 선택이었는지 이렇게 길들여진 건지 헷갈렸을 것이다. 죽었다가 살아난 곳이 어차피 최악일 때, 돌아갈 곳이 없을 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누가 알려주지 않았을 때 치건은 물에서 건져졌지만 살아있다고 느낀 적 없었다. 이게 어떻게 살아있는 걸까. 700만 원 빌린 사람한테 6천만 원 이자를 붙이며 생계의 모든 것을 빼앗고 있는데, 맞는 아빠를 말리는 미취학 아동을 내던져서 혼수상태로 만들어 버렸는데, 자기처럼 살까 봐 돈을 보태준 애의 손톱을 뽑고 사람 죽이라고 칼을 쥐어 주고 있는데, 목소리 깔며 형님이 아니라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면 뭐 하나. 자신을 죽도록 냅둔 애비, 자신을 살려놓고 남을 죽이라고 시키는 두목과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데. 치건은 자기의 삶 전체가 복수의 과정인지 실패한 부활인지 더 나은 롤모델을 찾지 못한 결과인지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동네 오토바이를 모조리 훔치는 좀도둑 사채업자 패거리의 대장 노릇을 하며 항상 죽음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래도 애비와 똑같은 인간처럼 보이는 건 당장 죽어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술은 입에 대지 않았다. 그게 자기 자신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존중이었다. 우연히 연규(홍사빈)의 사연을 듣는 순간 자신도 낚시 바늘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시체가 누굴 돕나. 최선을 다한 들 못질 끝난 관짝이었다.


연규는 안 맞고 사는 게 꿈이었다. 엄마와 재혼한 아저씨가 패고 학교 미친 새끼들이 패고 멍과 피가 지워질 날이 없었다. 집, 학교, 동네 전체가 지옥이었다. 돈은 늘 부족했다. 모든 순간이 사건과 사고였다. 불쌍한 엄마 빼고 다 싫었다. 이런 연규에게 치건의 등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었다. 천국의 빛이자 문고리였다. 연규는 치건이 베푸는 돈과 친절과 역할(도둑놈, 사채업자) 부여에 "고맙습니다"가 절로 나왔다. 사는 내내 폭력에 시달리던 청소년은 그렇게 범죄자가 되었다. 이제 살인자가 될 차례였다. 다른 옵션은 없었다. 어차피 죽을 놈 건져준 곳에서 시키는 일은 남의 목숨 빼앗는 일이었다. 연규는 최고의 도둑, 사채업자, 살인자가 되는 게 꿈이 되었을까. 손톱을 뽑혀도 암묵적 룰은 지키고 싶었을까. 하지만 여기는 치건과 연규만 발버둥 치는 세계가 아니었다. 어떤 세계든 그 세계에 천착하는 이끼 같은 악귀들이 들러붙고 있었다. 맞는 자들이 패는 자가 되고 죽어가던 자들이 죽이는 자들이 되고 있었다. 훔친 오토바이로 도망쳐 봤자 훔친 오토바이였다. 궁지에 몰린 연규는 자신을 유일하게 사람 취급해 준 하얀(김형서)을 재물로 내어주고 시간을 번다. 난 이 장면에서 연규가 현실감각과 판단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가장 악독한 범죄자가 되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바늘에 귀가 찢겼던 치건의 몸통에 연규의 송곳이 들어갈 때 치건의 인생은 하나로 완성되었다. 치건은 이때를 영원히 갈망하고 있었다. 끝나거나 끝내거나 그만하고 싶었다. 삶이든 도둑질이든. 훔친 오토바이처럼 내 의지로 작동하지 않는 삶. 화란은 죽음보다 못한 삶을 전시한다. 그리고 희망이 아닌 도망을 제시한다. 남의 바늘과 훔친 물건으로는 끝까지 갈 수 없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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