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그

by 백승권

마음이 앞선 대화의 단점은 듣는 이의 배려와 인내에 깊이 의지해야 한다는 점이에요. 장시간 핑퐁이나 티키타카의 가능성이 낮습니다. 동공이 무한 확장되고 과호흡이 올 정도로 오랫동안 참아왔던 울분과 벅참을 담아 날카롭고 강렬하며 풍부한 표현은 에너제틱하게 공연될 수는 있겠지만 클라이맥스로만 120분 이어지는 스테이지는 뒷맛이 비릿합니다.


피 튀는 격투기 중 어떤 경기가 오래 잊히지 않는 건 상대의 얼굴을 부수는 펀치력 때문이 아닌 경기가 종료된 허그하는 장면 때문이었어요. 전문적 룰을 모르더라도 저런 장면은 긴장감을 모조리 해체시키죠.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모른 채 격돌하며 목숨을 빼앗을 투지로 난타를 교환했지만 그럼에도 당신을 존중한다는 의미처럼 읽혔어요.


빠르고 강한 펀치보다

느리고 깊은 허그...

우리는 지금 이게 필요해요.


물리적인 스킨십이 아니어도 돼요. 아주 사소한 몇 마디라도 나누다 보면 우리의 얼굴을 마주 밀착하고 있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이런 온기로 지긋이 감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허그처럼 느껴지니까. 이걸 경험하며 느끼면 한동안 경험하며 느끼면 지속적으로 경험하며 느끼면 빈번하게 경험하며 느끼면 거대하고 투명하며 견고하고 편안한 보호막이 형성되어 있다는 걸 알게 돼요. 이 안에서는 무슨 이야기든 가능해져요. 비로소 내가 나로 우리가 우리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해져요. 자신이 더 좋아지고 우리에게 더 의지하게 되며 이렇게 나는 우리가 됩니다.


시간의 유한함에 쫓겨 응축된 눈물과 절박한 그리움만 토해내다 보니 일상을 너무 전쟁이 끝나지 않은 폐허처럼 인식하는 모습만 전하지 않았는지. 하루하루는 잘 지내고 있는지 제대로 묻지도 못하고. 물론 멍과 상처가 가득한 상대 앞에서 눈치 없는 유머만 던질 순 없겠죠. 그래도 우리는 조금 느리게 진정하며 서로의 보이지 않던 시간을 조금 더 더듬어 볼 시도는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건 결국 자신에 대한 태도겠죠.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지내서 내게 없는 걸 상대에게 바라고 있진 않은지. 우린 여전히 너무 많은 것들이 미개봉으로 남겨져 있어요. 뜯지 못한 편지에 둘러 싸여 전달되지도 못한 물음에 대한 답변만 기다리다가 긴 잠에 들까 봐 이렇게 몇 자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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