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승권 Feb 03. 2017

김훈 소설, 공터에서

김훈 장편소설. 공터에서

너의 추위를 생각하니까 내 마음이 더워졌어.


인민군은 대학병원에 수용되어 있던 국군 부상병들을 마당으로 끌어내 총살하고 사체를 병원 담장에 널었다. 사체는 여름내 비를 맞았다.


배가 고프면 창자에서 찬바람이 있었고 몸속이 비어 투명했다. 배가 고프면 눈을 가늘게 뜨게 되는데, 눈꺼풀이 떨려서 세상이 흔들렸고 가까운 것들이 멀어 보였다. 배가 고프면 후각이 민감해져서 거리의 사람 냄새나 물이 오르는 가로수의 풋내가 코끝에 어른거렸다. 배가 고프면 배고픔이 몸속에 가득 차면서도 몸이 비어 있는 느낌이었는데, 음식 냄새가 코를 스치면 배고픔은 창끝처럼 뽀족해져서 창자를 찔렀다.


배가 고프면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맛의 헛것이 빈 마음에 번져 있었다.


내가 그 인간하고 살을 섞고 살아서 너희들을 내지른 세월을 생각하면 내 가슴에서 벌레가 끓고 들불이 인다. 너는 힘들고 쓸쓸하면 너보다 더 쓸쓸한 이 어미를 생각해라.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의 전부다.


수색조가 적의 박격포 탄에 맞아 사지가 흩어졌을 때도 마장세는 그 적개심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흩어진 사체들이 살아남은 자들의 적개심에 불을 질렀다. 애초에 적과 나 사이에 무슨 적대 관계가 있었기에 서로 죽여야 하는지를 적에게 물어볼 수는 없었고 적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일 테지만 마주쳤을 때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하는 것은 적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나고 보니 이 답답함이 적개심의 근원이었다.


기호가 실물을 표현하는 능력을 갖는다는 것을 마차세는 긍정하기 어려웠다. 기호와 실물 사이에 허방이 있어서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이었다. 이 거듭되는 억 단위의 숫자를 읽을 때 마차세는 그런 두려움을 느꼈다. 기호가 실물인 것을 잊어버리고 거기에 부딪히면 죽거나 다칠 것이었는데, 기호는 실물과 사소한 관련도 없이 떠돌다가 사라지는 부표와 같았다.


-이상 공터에서 본문 중





한 장 한 장 같은 한 자 한 자. 저 먼 타국의 비극이 담긴 보도사진 같았다. 눈을 가리고 싶었지만 아득한 운명들이 다다를 곳의 정체가 너무 궁금했다. 마동수, 마차세, 마장세. 삼부자의 삶 속엔 김훈의 오랜 인장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구체성, 날 것의 냄새, 서글픔, 벼린 날의 기운, 무자비함, 연민과 온기, 소외와 소멸, 태어난 자들에게 닥치는 저항할 수 없는 것들이 뒤섞인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풍경. 함부로 이것을 허구라 부르지 못하겠다. 그 시절 죽은 사람은 박정희만이 아니었다.


삶은 늪 같았다. 모두 각자 길을 잃었고 모두 각자 늪에 빠졌으며 모두 각자 더럽혀졌다. 홀로 있어도 혈연이라는 악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살기 위해 타인들과 연을 맺어도 출구를 찾지 못했다. 혼란한 시절, 욕망이 덫이었다. 계속 걷기 위해선 목적을 가져야 했고 목적은 삶을 피곤하게 했다. 서로를 다투게 했으며 누군가를 멀리 밀어내고 또는 죽게 했다. 여기저기서 내몰린 사연 많은 인간들끼리 남은 밥줄을 잡기 위해 죽음으로 더 내몰렸다. 다 밥을 먹기 위해 하는 짓.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전쟁터로 쫓기고 살인을 저지르고 부모를 묻었다.


아득했다. 생은 살아지는 것. 밀리고 쓸려서 휘청일 뿐,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방법이란 없었다. 애초 방향을 원할 기회가 주어지기나 했을까. 마동수의 둘째 아들 마차세 역시 꾸역꾸역 삶을 감당하고 있었다. 늘 술에 취해 집에 거의 오지도 않는 아비 마동수, 널 낳지 않으려 했다고 종종 이야기하는 어미 이동순, 아비와 한국, 자신의 모든 근원을 싫어해 떠나는 형 마장세, 그 사이에서 마차세는 주어진 환경의 한계과 불안한 시절의 압박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넘지 못한다. 그저 받아들이고 상처 입고 주저앉고 겨우, 겨우 살아낸다.


기억 속 서슬 퍼런 환영이 되어 살아있는 내내 옭아매는 각자의 사연들이 서로의 사연들 속으로 침범하고 있었다. 섞일 때는 생각이 없었고 섞이고 난 후에는 어떤 것도 되돌릴 수 없었다. 누가 피난민 배 위에서 갓난아이와 남편을 잃어버릴 줄 짐작이라도 했을까. 누가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전우를 직접 죽이게 될 줄 알았을까. 누가 전쟁 속에서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를 낳게 될 줄 알았을까. 한번 떠난 형이 부모가 죽어도 돌아오지 않을 줄 어찌 알았을까. 알았더라도 뭘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땅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과거의 공간이 낯설어진 지금, 마차세는 돌아갈 의지도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그 자리에 남아 있으려 발끝에 힘을 줬지만 발밑과 주변의 모든 선과 면이 쉬지 않고 바뀌고 있었다. 어린 날 애틋하게 소식을 나눴던 소녀가 아내가 되어 있었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고 어미를 걱정하는 마차세를 더 걱정하고 더 위로하고 있었다. 걱정은 쌍방향으로 공평하게 오고 가지 않았고 마차세는 늘 어미 이동순과 형 마장세, 그 사이에 얽힌 죽은 아비 마동수 생각에 삶을 저당 잡히고 있었다. 어느 하나 당연 할리 없는 아내 박상희의 사랑을 집안이 넘치도록 부여받고 있었다. 마차세는 말수가 적었지만 조금은 느꼈으리라. 마차세와 박상희는 김훈이 생성한 역대 캐릭터들 중 가장 따스해 보이기도 했다. 피로와 서글픔으로 점철된 생 속에서 둘은 서로의 입 속에 자신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교훈은 없다. 김훈은 생의 지친 걸음 속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을 주어 모아 부정할 수 없는 증거처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곁으로 다 전해질 수 없는 침묵의 사연들은 모조리 초라해 보였고 야망조차 누추했다. 돈을 많이 버는 방식은 기민함으로 시작해 범죄로 끝나고 있었다. 이까짓꺼 안 걸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사기꾼의 공통점이 아니라 이윤추구의 과정 속에 놓인 만인의 본능과도 같았다. 생성의 이전부터 소멸의 이후까지 개인의 의지가 핏줄과 시절의 늪을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적어도 현실감각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김훈의 문장들은 고요히 단언하고 있었다.


모두가 태어나 모두가 죽는다. 이 사이 이어진 선이 겹치더라도 같은 궤적을 그리는 생은 없다. 인간의 상상력이 구획한 범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신체 면적보다 작은 감옥에 갇혀 꿈을 그리는 연습과 악몽에서 깨어날 묘안을 반복하다 의도치 않고 원치 않았던 예측불허의 사연을 통해 사그라질 뿐이다. 순간을 감지하는 현실감각이 명민하게 빛나는 순간도 있지만 파도 속 잔물결일 뿐 해류는 방향을 틀지 못한다. 순응해도 통증은 멈추지 않고 비껴 나려 몸을 뒤튼 들 닥치는 것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애초 가능성조차 없었다. 김훈의 세계 안에서 나의 주체는 내가 아니다.








이전 09화 김훈 소설, 흑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