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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Apr 22. 2017

김훈 소설, 흑산

김훈 소설, 흑산

<흑산>, 소설을  이가 김훈이라기보다는 김훈이 빚은 김훈의 글이다. 300페이지가 넘는 동안 하나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소설은 내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하여 세상에 크게 알려진 극소수의 작품 외에 더디 접했다. 김훈의 소설은 그중 하나였고 <칼의 노래> 충격이었다. 에세이 <바다의 기별> 아름다웠고, 다른 소설 <공무도하> 현대를 다루되 다르지 않은 안갯속에 엮인 이들과 그들이 사는 곳을 적고 있었다. <남한산성> 대하기  <흑산> 먼저 당도했다. 그리고, 공포와 마주했다.

육필로 파고들었을 문장 앞에서 난. 내내 두려웠다. 행간과 행간 사이에서 시선은 물론 청각, 후각, 촉각이 모두 기능했다. 사람과 사람의 사건을 이리 적을 수 있다는 점이 실감 나지 않았다. 해석보다 실존에 밀접했고, 듣기보다는 말하는 것에 압도당하고 있단 표현이 더 옳았다. 여러 인물을 다룬 긴 호흡의 이야기 속에 단지 수사에 얽매여 열광하는 것은 아닐 테다. 공통의 얼개에 매여 있었지만 등장인물 개개의 이야기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었고, 분절된 구조였으나 흐름을 놓칠까 뒤를 펼친 적은 다른 소설보다 적었다. 기억력이 미진해 이야기에 다양한 인물이 등장함을 어려워하는 편이지만 각각의 인물에 맺힌 강력한 사연은 (지난 페이지의 서술에 대한 기억을 강요하는) 인물과 인물의 얽힘이 아닌 , 이야기와 이야기의 얽힘이었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잉태했고,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올랐으며, 과정과 어떤 결과들에 이르렀다. 다수는 죽고 누구는 그저 살아남았다.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삶에 천착했다. 생존 자체에 몰두하는가 하면, 이승 너머를 보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 의미를 두지 않는 무리들도 있었다. 흑산은 크게 두 무리의 이야기였다. (천주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무리와 기존 질서의 붕괴를 두려워하여 이를 억압하는 무리가 있었다. 천민으로 태어나 천민의 자식을 낳고 자식도 천민이 되어 천민으로 죽어야 하는 조선의 낮은 계급들에겐 희망이 없었다. 길은 늘 정해져 있었고, 길을 벗어나는 것은 목숨과 맞바꾸는 일이었다. 일부 지식인들이 천주의 의과 글을 전했고, 기도문은 퍼져나간다. 삶 다운 삶에 대한 갈구가 맺힌 기도문. 단순하고 당연한 내용이 그들의 의식을 관통한다. 사람의 소리와 소리로 퍼져 나간다. 절박한 마음들이 소리 없이 모이고, 처음 만나는 자유와 마주한다. 정신마저 묶여있던 하나의 사물에 지나지 않았던 천민들은 개개의 존재로 인정하는 천주의 뜻에 감화되었다. 모든 것을 속박하던 계급의 구분은 덧없었고, 이는 곧 나라가 정한 이치와 지배계급의 뜻에 대치하는 부분이었다. 작은 불씨였지만, 메마른 들녘을 모조리 태울 수 있는 위협으로 여겨졌다.

사직은 경계하고 대비는 분노한다. 굶주리고 억압당한다 하여 이것은 할 짓이 아니었다. 근간을 흔들고 붕괴를 초래하는 악이라 여겼다. 잡아들인다. 뼈와 살을 부수고 목을 벤다. 고문하여 근원(황사영)을 찾고 덩굴째 잡아들이기 위해 첩자를 심는다. 형틀에 묶여 형제가 죽고 아비를 잃고 누이가 죽는다. 사학을 좇은 자들은 말해도 죽고 말하지 않아도 죽었다. 귀에 화살을 꽂고 형장에 끌려 나와 칼을 받았다. 그렇게 형제를 잃은 정약전은 흑산으로 유배된다. 거기서 물을 만나고 소울음과 만나고 서식하는 사람들과 만나며 자신이 결코 이곳에서 나가지 못할 것임을 직감한다. 육지의 사람들은 쫓는 자와 쫓기는 자였고, 흑산은 그 안에서 결정된 운명의 이들이 끌려오는 분리된 곳이었다. 바다로 갈린 캄캄한 섬.

흙에서 파온 단어와 문장들이 나무로 만든 종이에 새겨있었다. 냄새가 나고 만져졌다. 축축했고 진했으며 아팠다. 추웠고 뜨거웠으며 따갑고 시렸다. 산과 강이 있었고 들판과 바다가 있었다. 살아서 깊이 호흡했고 다음 행로를 궁금히 여기게 했다. 어제의 기록같이 생생했고, 핏줄의 일처럼 미어지기도 했다. 사람의 일이었고, 살아있는 것들의 일이었으며, 이어져 있었고 죽어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기대했던 자극을 넘어 상상치도 못한 격정을 만났다. 조금 알았으나 처음 듣는 이야기 같았고 계속 듣고 싶은 이야기였다. 이런 글을 지어야 밥을 먹고 사는구나. 생각이 베어지고 독자로서 차림이 부끄러웠다. 압도당했고 묶여 움직이지 못했으며 인물들의 생각에 반응하고 움직임에 동조했으나 생사의 갈림과 죽음과 맞닿았을 때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간결하고 건조한 끝이었다.

이승의 모든 일을 관찰한들 저리 말해지고 전할 수 있을까. 지은이의 역사관, 사상, 생각보다 글을 쓰는 이로서 글을 짓는 태도와 그 결과에 순응하게 했다. 물살을 가르는 물고기처럼 꿈틀거렸을 상상력. 파괴하고 파괴하며 새살을 돋게 했을 창작의 근육들. 인간의 말과 고군분투하며 다시 쓰고 다시 지웠을 고단함과 시간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닮고 싶다 하여 닮아질까. 시간을 들인 들 가당키나 할까. 다시 보겠다. 다시 읽고, <남한산성>과도 만나야겠다. 소설가와 문장가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더라도 김훈은 <흑산>을 통해 다시 알려줬다. 아직 가지 못하고 어쩌면 영영 닿지 못할 그 길에 쓰일 가치가 있는, 세상에 알려질 가치가 있는 이야기와 담긴 사람들이 있다고. 누군가는 그걸 했고 지금도 하고 있으며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고. 글의 무게를 알고 글이 담는 한계와 가장 극명하게 부닥쳤을 과정이 쉬 그려지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말과 글에 영어를 섞으면 지식인이 되는 이 땅에서, 김훈의 소설은 한글이 가진 힘을 보여준다. 이도가 그린, (한글 창제 이후에 펼쳐질) 세상의 생명력이 결코 다하지 않음을 증명한다. 단어의 뜻을 찾아 사전을 뒤지고 문장을 이해하려 애쓰게 한다. 인간이 걸어온 길, 세상이 걸어온 길, 나라가 걸어온 길을 탐구한 행적이 종이와 먹 사이에 담담히 서려있었다. 지울 수 없고 숨길 수도 없다. 읽는 이가 지닌 앎과 혜안에 따라 더욱 깊고 또 격렬할 테다. 우연히 집어 들었고, 이제 그의 다른 책을 찾고 있다. <흑산>에서 다 빠져나오지 못한 차림으로 <남한산성>으로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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