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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Apr 22. 2017

김훈 소설, 남한산성

김훈 소설, 남한산성

경계에 선 자들에게 그 해 겨울은 엄혹했다. 조선 강토를 짓밟으며 청병이 다가오고 있었고 조선의 임금은 두려움에 도망하는 백성들 사이를 뚫고 남한산성에 다다랐다. 성벽을 두고 대치하는 것들의 성격은 명백했다. 조선과 청이 대치하고 있었고 조선의 임금 인종과 청의 황제 칸이 대치하고 있었으며 조선의 병사와 청의 병사가 대치하고 있었다. 쫓겨온 자와 쫓아온 자의 대치였고, 굶주린 자와 배부른 자의 대치였고, 말과 말, 문장과 문장의 대치였다. 대치는 두려움을 불렀고 두려움은 소문을 불렀다. 조선 백성은 소문을 듣고 소문을 퍼뜨렸으며 소문 안에서 사실과 거짓을 구분할 줄 몰랐다. 대치는 성벽을 사이에 둔, 성 밖과 성 안의 것이 아니었다. 성안에서 군과 신이 대처하고 있었고, 병과 병이 대치하고 있었으며, 병들의 목숨과 성첩을 덮는 추위가 대치하고 있었다. 성 안과 밖에서 누구도 대치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어디도 대치를 피할 곳은 없었다. 김훈은 장편소설 ‘남한산성’을 통해 병자호란 47일간의 대치를 무참히 적어 내려간다.


수사가 절제된 문장 안에서 사람과 사건들이 눈밭에 스러진다. 청병을 안내하려던 사공은 예판 김상헌의 단칼에 베어지고, 냉혹한 추위에 맞서는 조선의 병사들은 언 몸으로 죽어가며, 주린 말들은 허기를 견디지 못해 느리게 숨을 거두고, 백성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하며 쓰러졌다. 임금은 두려움에 견디지 못해 하늘 밑에 쓰러져 울고, 신하들은 임금에게 사직의 보존을 간청하며 쓰러지며 학자들은 나라의 운명에 곡기를 끊고 궁 앞에서 머리를 찧으며 쓰러졌다. 또한 사공이던 아비를 잃은 어린 여식이 정처 없는 발길 끝에 성 앞에서 쓰러지고 몇 번의 크고 작은 전투 끝에 조선병과 청병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며 조선땅을 침범하여 성의 함락을 노리는 청의 무리들은 허리를 꺾으며 웃다 쓰러졌다. 이처럼 다른 장소, 다른 시간, 다른 운명 속에서 목숨은 꺼져갔고 남은 것들 또한 쓰러짐의 시차만을 다투고 있었다. 임금은 쓰러져가는 국운 앞에서 더 이상 쓰러지지 말아야 할 것들을 결정지어야 했고 가까운 신하들은 이를 독촉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지 않는 혹독한 쓰러짐 속에서 볕이 길어지고 강물과 언 땅이 녹으며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임금은 출성 하였고 예를 갖추어 청의 황제 앞에 세 번 절하였으며, 술잔을 받으며 아홉 번 더 절하였다. 세자와 궁의 신하들을 볼모로 내주었다. 1637년 인조 15년의 일이었다.


'남한산성'에서 생과 사를 바꾸는 참혹한 풍경의 변화와 황폐한 심경의 궁핍한 무리보다 인상적인 장면은 말과 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휘둘리던 임금의 무력함이었다. 술에 취해 폭압하고 희롱하던 임금은 있었을지 망정, 저토록 가혹한 운명 앞에 나서야 했던 군주는 흔치 않았다. 절대군주는 말과 허울이었다. 경계 밖 청국의 병사들과 황제는 인정하지 않았고, 이를 아는 성첩의 대열은 늘 불안하고 성안은 불온했다. 나라를 오가는 문서에 적힌 글자들은 그 의미의 단순성에 있어 쓴 자와 읽는 자의 운명을 갈랐다. 조선의 임금은 인질 같았고, 청의 황제는 신과 다르지 않았다. 인질 같은 조선의 임금 앞에서 신은 거침이 없었고, 신 같은 황제 앞에서 조선의 임금은 꼬리를 내린 짐승과 다르지 않았다. 임금이 꿇은 무릎은 조선의 하늘과 국토와 만백성이 꿇음을 상징했고, 임금이 숙인 고개도 이와 같았다. 임금은 가장 앞에서 가장 무력했고, 가장 먼 상대 앞에서 가장 뒤에 있는 자의 모습으로 머리를 조아렸다. 작가는 서문에 밝힌 듯, 누구의 편도 아닌 다만 고통받는 자의 편이었기에 작가 김훈은 조선 백성의 편이기도, 그들을 끝내 지키지 못한 임금의 편이기도 했다. 성첩에서 얼어 죽어간 병사들의 편이기도 하고, 언 강에 거꾸로 꽂힌 이름 모를 조선 아이들의 편이기도 했으리라. 그때 기록된 모든 이들이 지금은 없지만, 그들이 돌과 흙으로 쌓아 올린 남한산성만은 음식점과 주차장에 둘러싸여 시멘트에 덕지덕지 발린 채 형태를 연명하고 있다. 조선은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고, 시간은 흘렀으나 대국과의 경계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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