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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Jun 23. 2022

김훈 소설집, 저만치 혼자서

김훈 소설, 저만치 혼자서

사람들은 똥을 누다 죽었고 물을 긷다 죽었고 죽은 자를 붙잡고 울다가 죽었다.


임금은 역적들의 가죽을 벗기고 무릎뼈를 빻고 가랑이를 찢어서 거리에 버렸다. 역적들의 아비와 아들과 형제들의 목을 베고 처첩과 딸과 누이들은 먼 변방 관아에 노비로 주었다. 임금은 경국전의 형률에 따랐고,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았다.


김유사의 강의를 듣고 있으면 인간의 역사는 9급 시험 문제로 출제되기 위해서 전개되는 것 같았다.


김루시아 수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말이 되어 나오려고 하는 그 생각을 버렸다.


짓밟힌 사람이 다시 삶을 추슬러나가는 모습은 겨우 조금밖에 쓰지 못했다. 고통과 절망을 말하기는 쉽고 희망을 설정하는 일은 늘 어렵다.


문상을 가면 고등학교, 대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서 소주 마시고 노닥거리는데, 문상 왔던 사람이 몇 달 후에 죽어서 문상을 받는다.


나는 날마다의 불완전 속에서 살고 있다.


글은 삶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다.





일상에서 독서는 묘한 지위를 지닌다. 독서는 독서를 최초로 경험하기 전부터 만인에게 수많은 권유와 찬사를 받아온 행위다. 세상 어떤 책들은 테러리스트 주니어를 위한 폭탄 제조법을 설명하고, 결단을 실행하고 싶은 이들을 위한 간편한 자살법을 준비물과 함께 알려주기도 하고, 나와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는 이유 등을 전하며 전쟁과 학살의 심지가 되기도 하는 데 독서는 초기 독서가들의 홍보와 미디어의 세뇌 덕분인지, 텍스트 중심의 지식에 대한 추앙 때문인지, 책을 읽어야 한다고 배우고 그렇지 못한 삶을 사는 이들의 죄책감 때문인지 최초의 책 이후 수백 년이 흘러도 고결한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다. 독서란 행위는 사회와 역사의 반강제적 압박을 갖춘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나는 독서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기 전부터 책이라는 물리적 매체를 좋아하긴 했다.


책을 읽는 순간 신경이 곤두서고 동공이 확대되며 심장이 쿵쾅거리고 기쁨과 흥분의 에너지가 넘쳐 오르는 등의 반응을 겪어서가 아니다. 책과 독서를 즐겼던 이유 중 하나를 떠올려보면 특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보는 동안엔 스스로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서. 타인과 환경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어서. 보이지 않는 벽 속에서 나를 가두고 책의 내용과 공존하며 작가의 의식을 살펴볼 수 있어서. 세상에 대한 작가의 해석과 또는 새로운 사실들을 알 수 있어서. 그걸 알게 되면 나는 그걸 알기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니까. 매력적인 관점이라면 반복적 접촉(독서 행위)을 통해 닮아갈 수 있으니까. 생각을 이렇게 기록할 수 있다는 점을 따라 할 수 있으니까. 독서가 바꿀 수 있는 건 세상이 아니다. 결국 책을 들고 보고 있는 독자 개인 한 명에게 무형의 가능성을 심어줄 뿐. 독서 행위 자체는 특별하지 않아서 아무리 반복해도 신경 쓰지 않았고 그 안에 숨어 타인의 관점과 역사를 내게로 옮겨올 수 있었다. 김훈은 내 생애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책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분명 지금과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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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적는 일은 영화 리뷰보다 훨씬 두려운 작업이다. 가시적인 영상과 대사, 배우와 감독에 대한 누적된 데이터가 있는 영화는 다양한 각도에서 생각과 경험을 끌어와 문장을 이어나갈  있지만 책은 오로지 문장의 총합이다. 사진집이 아니라면 문장은 책의 전부다. 결국 서평은 문장을 문장으로 재생산하는 일이다. 책의 문장과 서평의 문장 사이에 작가와 수용자의 개별적 사고와 역사 인식의 차이, 철학과 경험 등의 수많은 강이 놓여 있지만 가시적 결과물은 결국 문장이다. 문장을 경험한  문장으로 생산하는 셈이다. 존경하는 작가의 책이라면 그의 문장이 각인되어 얼얼할 지경이라면 지금까지 이런 경험이 누적되었다면, 서평은 문장의 씨줄과 날줄로 엮은 촘촘한 스웨터가 아닌 오르기 전부터 사지가 얼어붙는 공포로 휘감빙벽이 된다. 김훈 작가의 거의 모든 책을 읽고 그중 일부를 적는 일이  그랬다. 위의  권은 정말 덜덜 떨며 남긴 희귀한 기록들이다.


서평은 물론 내게 의무가 아니지만 김훈 작가의 새 책을 경험하는 일은 의무에 가깝다. 나의 독서 행위 중에서도 매우 특별한 지위를 지닌다. 소설과 에세이의 경계를 크게 두지 않는다. 그의 육필이라면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의 신간이라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겸허히 주변의 공기를 고요히 얼어붙게 한다. 이번 '저만치 혼자서'도 그랬다. 놀라운 영화들이 수용자가 지닌 기존의 사고를 완전히 부수고 뇌를 끄집어내어 새로운 페인트에 담근 후 새것으로 바꾸어 주듯, 김훈 작가의 새 책들은 잊고 지낸 것들의 가죽을 사슬에 걸고 끌어올려 용광로에 넣고 제련한다.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이후 단편을 엮은 소설집이었다. 현실과 픽션의 괴리가 없는 그의 글을 단숨에 삼켜야 했다. 박스에서 꺼내자마자 조명이 있는 모든 곳에서 지하철 역에서 이동하며 지하철 내부에서 SRT를 기다리며 터널을 지나는 SRT 안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리며 시내버스 안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며. 책은 쉼 없이 열리고 덮이고 책장은 서걱거리며 숨을 내몰아 쉬었다.


문장들은 납덩이같았다. 늘 엉겨 붙어 있었으나 애써 감지하지 않으려 했던 핍진한 삶의 질량과 중력이 뼈와 심연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모든 문장에 오랜 포구의 '디젤 연료 타는 냄새와 생선 비린내, 갈매기 울음소리'가 뒤섞여 있다. 김훈 작가는 여전히 노년과 청년을 쓸쓸히 바라보며 그들의 그늘과 새벽의 신음과 냄새를 깊숙이 듣고 들이마시며 세세하고 처연하게 무엇보다 강렬히 연민하고 있었다. 평일과 주말 늘 같은 리듬감을 유지하려 발버둥 쳤던 긴장과 조바심은 김훈의 문장을 다시 체험하며 육중한 무게감과 함께 바닥에 붙더니 좀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이 무게감을 유지하며 인물과 삶, 시대와 파도를 읽었고 중압감이 목까지 차오를 땐 숨을 죽여가며 뱉어야 했다. 김훈 작가조차도 타인의 삶을 글로 옮기는 과정에 고단함과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써도 어쩌지 못하며 더욱 나빠지기만 하는 세상을 기어이 꾸역꾸역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 대한 채무감. 김훈 작가의 생물학적 노화가 더디었으면 좋겠다. 그의 펄떡이는 육필로 읽고 싶은 세상의 소외와 비린 일상, 훼손된 역사와 희생된 개인사가 한없고 아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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