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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권 Aug 11. 2020

김지은입니다, 싸움의 결과를 바꾸다

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맨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다 보면 많은 싸움을 목격하게 된다. 그 싸움은 지인부터 먼 타인까지 또는 가까운 일부터 상관없다고 여겨지는 일까지 다양하고 가지각색이다. 때로는 어떤 싸움의 당사자가 되기도 한다. 힘에 부칠 때는 대신 싸워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누구든 내 쪽에 서주면 좋겠다 라고 바라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운은 일어나지 않고 홀로 싸우다 다치거나 시간이 지나고 잊히게 된다. 다수에게는 잊히지만 당사자에게는 생생한 싸움. 모든 싸움은 다르다. 구경거리거나 내 피를 흘리거나. 집단 대 집단이거나, 개인 대 개인이거나, 세대와 세대, 팩트와 허구, 과거와 미래, 이상과 현실... 내가 어디 서 있느냐에 따라 인식하는 싸움의 성격이 결정된다. 모두 나의 싸움이거나 모두 너의 싸움이거나. 참여해야 하거나 외면하고 싶거나.


김지은 씨의 싸움은 시작부터 너무 불리해 보였다. 대선후보 비서와 대선후보의 싸움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자와 모두가 아는 자의 싸움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성폭력 피해자와 모두가 아는 차기 대통령 후보자의 싸움이었다. 김지은 씨의 주변 사람과 김지은 씨를 아는 사람과 김지은 씨를 모르는 사람 모두가 성폭력 가해자이자 차기 대선 후보 안희정을 비호하고 있었다. 차기 대선 후보라서 막강한 권력자라서 안희정을 비호하고 있었다. 피해자 증언이 저렇게 상세하고 분명한데, 온갖 압박과 술수를 써가며 안희정의 세상이 김지은 씨의 모든 것을 파괴하려 하고 있었다. 성폭력 사실을 지우려 달려들고 있었다. 이건 너무 불리해 보였다. 무엇보다 공정하지 않았다.


남성 중심 사회의 남성 권력자가 여성 인권에 대한 심각성을 자각한 날, 자신의 가장 가까운 직원이자 지인이자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성폭행하고 다시 여성 인권의 중요성을 지지자들에게 부르짖으러 갔다. 이 팩트를 가해자와 가해자 주변 거의 모두가 부정하고 있었다. 김지은 씨를 죽음으로 몰아가기 위한 잔혹한 공격과 함께. 말과 글로 다시 옮기기 조차 힘든 길고 끔찍한 과정을 지나 김지은 씨의 피해 사실은 인정되었다. 그리고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법정 구속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징역 3년 6개월의 확정판결'이 내려졌다.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입니다'에는 안희정 징역 3년 6개월 확정판결이 내려지기까지 김지은 씨의 외부와 내면의 처절한 사투가 담겨 있다. 기록된 가해자는 안희정뿐이 아니었고, 피해자는 김지은 씨뿐이 아니었다. 이름과 살과 뼈와 가족과 친구를 가진 살아있는, 매일 마주치며 지금 여기를 사는 인간들이 가해자였고 피해자였다. 사건 당사자이자 저자인 김지은 씨는 안희정을 비롯한 주변 가해자들을 함께 고발하고 자신 김지은을 비롯한 주변과 과거 현재 미래 시간대의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연대하기 위해 이 기록을 세상에 공개했다. 내외부적인 죽음으로 내몰렸던 시간들, 한 줄 한 장이 모두 피와 눈물로 새겨진 실제의 비극이자 고발이었다. 실제 했던 고통은 활자로 옮겨진 후에도 적나라하게 파헤쳐진 수술 부위 같았다. 다른 시공간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을 뿐인데도 무겁고 힘겨웠다.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김지은 씨의 싸움이 이걸 가능하게 했다. 막강한 지지세력을 둔 권력자의 성폭력이라는 사건 속에서 피해자가 지지 않은 싸움의 사례를 만들었다. 사람은 바뀌지 않을지언정 시대가 바뀌었다는 엄청난 메시지를 증명해냈다. 피해자는 일상에서 회복의 절차를 지나고 가해자는 감옥에서 형벌의 시간을 받아야 한다. 김지은 씨는 싸움의 결과를 바꾼 인물로 오랫동안 회자될 것이다.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싸움들 또한 김지은 씨의 이번 결과에 영향받을 것이다. 개인 대 개인, 개인 대 집단의 싸움을 넘어 낡고 더러운 시대와 새로운 저항의 시대의 싸움이었다. 중심에 김지은 씨가 있었다. 이름과 가족, 친구와 직장이 있는 평범한 여성이 거대한 국가 성폭력 세력과 싸워 범죄 사실과 범죄자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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