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우리가 캐는 건 석탄이지 시체가 아니에요.”

요한 렌크 감독. 체르노빌(HBO)

by 백승권

우리가 캐는 건 석탄이지 시체가 아니에요.


산모가 피폭돼서 죽을 수도 있었는데 태아가 방사능을 대신 흡수했답니다. 아기가요.


우리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진실에 대한 빚이 쌓입니다.


철교에서 구경하던 사람들 중 생존자는 없었다고 한다.


추정되는 사망자 수는 4,000-93,000명이다.





지옥은 진부한 표현이다. 고통 슬픔 후회 등 인생에서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을 함축하고 있다. 한계를 담고 있다. 인간이 자신이 겪은 고통 슬픔 후회를 표현하는 가장 최대치, 또는 인간이 타인의 고통 슬픔 후회를 대상화하는 가장 최대치의 표현. 그래서 지옥이란 표현은 늘 바쁘게 오간다. 일상의 대화와 영화 속 대사를 오가며 여러 가지 차원과 상황의 지옥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상징한다. 상징. 실제를 대표하는 이미지. 지옥은 이미지다. 겪지 않았으니까. 죄짓고 참회하지 않은 자들이 죽은 후 도착하는 최악의 사후 세계가 지옥의 대략적인 원래 의미로 알고 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최악의 장소. 듣는 자들의 공포심을 유발하고 이를 통해 교리에 길들이는 장치. 과거 신의 뜻을 거스른 대가로 영원한 징벌을 받는 장소로 상징되던 지옥은 현대로 옮겨 오며 전쟁, 학살, 가난 등 역사적 개인적 사회적 관점의 상징적 비유로 활용되고 있다. 오래전 지옥이 절대 가지 말아야 할 장소였다면 이제는 이미 겪고 있는 곳으로 쓰이고 있다. 상상 속 끔찍한 장소에서 동시대의 삶에서 경험하고 있는 개인과 다수의 물리적 공간과 시기, 사건사고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마디로 현대의 지옥이란 가장 끔찍한 고통과 슬픔과 후회를 겪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심리적 고통? 실제 입은 상처의 아픔? 끝나지 않는 괴로움? 경악스러운 장면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비명과 죽음? 평생을 거주한 집과 동네의 무참한 오염과 소멸? 세포 조직의 갑작스러운 붕괴? 온몸의 근육이 허물어지고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 불구경을 했던 한동네 사람들 모두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잿가루를 뒤집어쓴 후 사망하는 일? 사랑했던 연인이 모두를 구하기 위해 달려간 곳에서 고통스럽게 사망하고 이후 자신도 오염되어 갓 태어난 아기가 4시간 만에 죽는 일? 죽음을 자원하는 일? 같이 일했던 수백 명의 동료 중 100여 명이 몇 년 안에 사망하는 일? 폭발로 부서진 흑연 조각을 만졌다는 이유로 손부터 녹아내리는 일? 명령을 어기는 순간 생계가 날아가는 공포와 위협을 받는 일? 모두 극단적 위험에 처할 수 있는 결정을 폐쇄적인 조직 내부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일? 국가 붕괴의 초석이 된 사건? 가장 최대 인원을 살릴 수 있는 옮은 방법을 아무리 주장해도 국가의 자존심 때문에 묵살되는 일? 그 대가로 셀 수 없는 국민이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진 일? 공기, 흙, 풀, 돌 하나까지 수만 년이 지나도 원래대로 복구될 가능성이 만무한 일?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수만 명의 죽음에 눈을 감는 일? 진실을 말한 대가로 살아온 모든 명예를 빼앗기고 자살로 내몰리는 일? 누군가 목숨을 내놓아야만 다수의 목숨이 보장되는 일? 그 과정에서 희망과 용기보다 절망과 희생, 침묵과 은폐 만이 남는 일? 지켜보며 숨을 쉬었다는 이유로 남은 수명이 단숨에 줄어드는 일? 우주 탐사를 위해 가장 앞선 기술로 제작된 로봇도 망가뜨릴 정도의 엄청난 방사능이 수십수백 킬로미터의 지역을 오염지역으로 만드는 일? 책임자는 없고 희생자만 있는 일? 수십 년이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축소되어 알려지고 있는 일? 그리고 여전히 이러한 위험을 안고 있는 시설이 세계 곳곳에서 각자의 지휘 체계 안에서 운영되고 있는 일? 그리고 실제 있었던 일, 여전히 끝나지 않는 고통 슬픔 후회로 남은 일. 또는 다시 반복될 수 있는 위험.


현대의 지옥은 설화가 아닌 인간이라는 실제 하는 구성원에게서 비롯된다. 인간의 입, 인간의 귀, 인간의 눈, 인간의 손가락, 인간의 두려움, 인간의 망설임, 인간의 책임 회피, 인간의 선택, 인간의 도망, 인간, 인간, 모든 원흉은 인간이다. 비겁한 소수가 무고한 다수를 무너뜨리고 다시 자신들의 제국을 건설하며 그 속에서 다시 다수를 희생시킨다. 반복한다. 지옥 속에서 다수의 죽음을 먹으며 연명하고 아기와 노인을 가리지 않고 학살한다. 권력자가 듣기 좋은 말을 내뱉고 무력한 자에게 한없는 책임을 전가하며. 약한 자들은 애초 선택권이 없다. 태어난 지옥에서 지옥을 겪다가 지옥 같은 죽음을 맞이한다. 이성과 논리, 도덕과 인류애가 통했다면 지옥이 생성되었을 리 없다. 지옥은 인간의 간교한 그늘을 찾아다니고 숨어 있다가 모든 판단력을 마비시킨 후 폭발한다. 소방 헬기를 격추시킨다. 자연을 기형으로 탈바꿈시킨다. 인간들끼리 서로 절멸시키는 법을 가르친다. 가장 악한 자들이 가장 오래 살아남는다. 가장 약한 자들이 가장 빨리 죽는다. 가장 약한 자들이 가장 고통받는다. 가장 약한 자들이 가장 많이 잃고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다. 역사에서 소멸된다. 기록이 거부되며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못한다. 다음 세대에게 죽음으로써 메시지를 전달한 권리마저 박탈당한다. 한없이 무력한 곳, 영문도 모르고 죽어가야 하는 곳, 시간이 죽어버리는 곳, 미래도 계획도 없는 곳.


1986년 4월 26일 1시 24분

소비에트 연방 우크라이나 SSR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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