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 이도와 영실의 불멸의 로맨스

허진호 감독. 천문: 하늘에 묻는다

by 백승권





이도(한석규)는 꿈이 많다. 왕이라서 백성 걱정으로 하루를 산다. 백성이 지금보다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이도의 꿈이다. 하지만 조선의 지위는 명의 아래에 있다. 명의 신하가 오면 조선의 군주인 이도는 절해야 한다. 조선 백성이 잘 사는 건 곧 조선이 잘 사는 것. 명이 이를 그냥 둘리가 없다. 시계도 만들고 천문 관측기도 만들고 한글도 널리 배포해서 백성들이 시간에 따라 하루를 잘 사용하고 자기 의견을 표현하며 삶의 질이 나아지면 좋겠는데 이는 곧 혁명과도 같다. 혁명엔 반대가 따른다. 기득권들의 입지가 좁아지는 거니까. 명을 따르는 궁궐의 신하들은 목이 터져라 반대한다. 이도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반대한다고 모두 죽일 수 없다. 그들 역시 조선의 일부이자 기득권의 대표이고 모두 쳐 죽인다고 해서 모두가 자신의 뜻을 무조건적으로 따를리는 없기 때문에. 선왕의 경우도 피에 젖은 용포만 남겼을 뿐. 하여 이도의 낯빛은 밝아 질길 없다. 별이 뜨기 전까지 그랬다. 이도의 깊은 그늘 위로 장영실이라는 별이 떠오르기 전까지는.


영실(최민식)의 등장으로 이도의 꿈은 실현되기 시작한다. 해시계, 물시계, 천문 관측기 등 하나하나가 모두 놀라움이자 위대함이었다. 이도에겐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재미있는 것들이었고, 이 모두가 단순한 눈요기가 아닌 생활과 삶을 바꾸는 중요한 과학적 성취였다. 이도는 영실에게 반하고 만다. 영실은 과학자이자 마법사와도 같았다. 영실 역시 이도에게 반하고 만다. 권위에 대한 순종이기도 했지만, 이도의 결정 하나하나가 영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고 있었다. 둘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같은 밤하늘 아래에서 별을 이야기할 만큼. 이별은 이도의 별, 저 별은 영실의 별. 둘은 같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별을 노래했다. 사랑을 고백했다. 앞으로 더 많은 별들을 서로에게 따다 주기로 약속한다. 별빛들이 두 사내의 가슴속으로 쏟아지고 있었고, 군주와 신하라는 계급 차이는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도와 영실의 사랑이 조선의 역사를 바꾸고 있었다.


조선의 임금이 명나라 황제가 아닌 노비 출신 공무원에게 빠진 것을 알자 신하들은 대노한다. 알량한 실력으로 관복을 입었다 한들 자기들과 하늘과 땅 차이라 여겼다. 판을 짠다. 이대로 가다간 조선이 아니라 자신들의 입지가 위태로웠다. 게다가 천한 백성들에게 글자를 가르친다니. 읽고 쓰는 건 권력 유지를 위한 중대한 도구였다. 모두가 읽고 쓰고 생각을 표현할 줄 안다면 권력 체계가 무너진다고 판단했다. 자신들의 권력과 국가의 안위를 일치시키고 있었다. 망상이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배경에 장영실이 있었다. 명나라 사신 또한 장영실이라는 걸출한 과학자가 이도와 함께 조선의 기존 질서를 흔들고 있음을 알아채고 저지에 나선다. 황제의 명이라며 천문 관측기를 부수고 불태우고 장영실을 명나라로 압송하려 한다. 이도의 사랑과 국운이 절체절명의 기로에 있었다. 여기에 거래 제안까지 들어온다. 영실을 포기하면 한글 배포를 위한 금속활자 제작을 지지하겠다고. 지지 없는 권력은 존재 가치가 없었다. 이도는 고뇌한다. 영실을 살려야 했다.


좁은 방 마주한 이도와 영실은 눈물을 멈추지 못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모를 수 없었다. 가까이 있지 못하는 동안 서운했고 가까이 있을 수 있어 바랄 게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서로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여기서 계급의 차이가 드러난다. 영실은 죽어도 이도는 죽을 수 없었다. 영실의 목숨과 이도의 목숨은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이대로 포기할 것인가. 영실은 이도에게 꿈을 현실로 보여줬고, 이도는 영실에게 왕과 마주하며 별의 질서를 논하고 무엇보다 희망 없는 삶 속에서 사랑을 안겨 주었다. 이도는 영실에게 도피를 명한다. 영실은 말을 듣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도를 위해. 역사가 기록한 둘의 마지막 순간, 영실은 도피가 아닌 형별을 받아들였다. 영실은 이도에게 단 한치의 해로움도 되고 싶지 않았다. 이를 위해 필요한 건 자신의 죽음이었다. 이도는 국가의 미래와 백성의 더 나은 삶, 왕이라는 지위와 영실 사이에서 복잡한 선택을 해야 했다. 영실은 이도의 내면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영실은 선택한다. 자신의 목숨이 아닌 이도의 꿈을. 오랜 세월 땅만 쳐다보며 살아야 했던 자신의 고개를 들게 하여, 세상을 밝히는 별을 선사해준 사람 이도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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