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드 필립스 감독. 조커
아서는 웃음이 많았다. 웃으면 견딜 수 있었다. 곤란한 상황에서도 웃으면 그걸로 입장과 대답이 될 수 있었다. 웃는 얼굴은 지옥으로부터 나를 가리는 나로부터 지옥을 가리는 가면이었다. 그렇게 여겨야 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물론 그렇다고 외로움과 고통, 삶의 지독한 고단함과 좌절감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모두를 만날 수 없고 모든 곳을 바라볼 수 없지만 세상 제일 불행한 사람은 아서 자신 같았다. 낡고 어두운 거주지, 병든 노모, 집에서 총을 쏴도 거들떠보지 않는 치안, 갑자기 날아드는 폭력, 폭력, 폭력... 폭력을 견뎌야만 겨우 구겨 넣을 수 있는 수입, 그마저도 위태로운 모든 순간, 기원을 알 수 없는 정신 상태, 내가 누군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끝없는 물음,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대체 누구인지, 내가 이렇게 되었기 때문에 복수하고 싶은 서늘한 분노, 수십 년에 걸쳐 쌓여가고 있었다. 그렇게 믿어야 했다. 나를 만든 건 나 자신이 아닌 타인과 선택할 수 없었던 환경이라고. 그래야 내 행동의 결과를 마주 앉은 자에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내 인생을 망친 자들을 내 손으로 죽여야 했어. 어릴 때부터 나를 묶고 때리고 속여서 키가 커지고 힘이 세진 후에 너를 죽였어. 늘 비아냥 거리고 도와주는 척 나를 무시하고 악행을 부추겨서 너를 죽였어. 오랫동안 존경했는데 단숨에 날 모두가 보는 가운데 웃음거리로 만들어서 너를 죽였어. 웃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세상 속에서 너희를 죽인 후 춤을 췄어. 그제야 자신감이 솟아오르고 몸과 영혼 속에 피가 돌고 세상이 밝게 보였어. 나를 죽이려던 것들을 죽인 후에 비로소 난 다시 태어난 거야. 날 끝없이 없애려던 것들을 내 손으로 없앤 후에 비로소 난 다시 살아난 거야. 존재의 명분을 획득한 거야. 그래, 왜 이제야 안 걸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죽여 없애면 해결된다는 걸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날 따르며 모두를 죽이는 자들이 넘쳐나니까. 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배트맨도 부모를 잃고 나와 조금은 공평해졌으니까. 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경찰, 기자, 추종자들 모두가 나를 쫓아오니까. 내가 그들 앞에 나서지 않아도 그들이 나를 찾아오게 만들었으니까. 웃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만들었으니까, 나를 쳐다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내가 무대 위 주인공으로 스스로 올라섰으니까. 어떻게? 그 무대의 주인공의 머리를 쏘아버린 후에.
살인을 해야만 겨우 날 쳐다보더군. 날 쳐다보니 기분이 좋아지더군. 그래서 다시 살인을 하게 만들더군. 내가 뭐라도 된 거 같았으니까. 아무도 모르던 자에서 적어도 잡아 쳐 넣고 죽이고 싶은 자로. 외로움을 벗어나는 방법은 누군가를 외롭게 만들면 되는 거였어. 이런 식으로 내면의 광기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다고, 악마가 되어 나와 세상을 어둠에 빠뜨렸다고 하면, 조금 더 관심을 가지려나?설명이 되려나?
누적된 자기 연민이 원형의 자아보다 비대해지는 순간, 아서(호아킨 피닉스)는 조커가 되었다. 여자 친구가 늘 곁에서 위로와 편안함, 즐거움을 준다는 망상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살인을 권력 획득의 도구로 설명하는 건 나름 근사해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를 상상 속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쾌감이 무엇보다 컸다. 현실에서 이해받지 못하다가 망상 속에서 영웅이 되는 거대한 판타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가장 관심의 집중이 되어버린 아이러니. 내게 소량의 꾸준한 배려를 베푼 자들을 제외한 모두를 심판하는 극단적 선택. 재능 없는 농담 대신, 테러를 통해서라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대리만족.
아서가 애초 시도하려 했던 건 자살이었다. 스스로를 단숨에 끝내는 대신 세상과 모두를 죽이며 자신을 지우기로 한 듯 보였다. 타자의 죽음을 통해 생명 연장의 명분을 얻는 삶, 나를 보며 웃지 않던 자들을 모두 울리겠다는 야망, '개인의 자유'는 늘 곡해된다. 존재한 적 없어서 해석이 난무한다. 모두가 대가를 치른다. 조커는 자신이 먼저 치렀고 그다음이 남은 모두라고 여기고 있었다. 망상은 자유다. 실행은 선택이다. 조커는 웃으며 망상했고 울면서 실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