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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Dec 08. 2021

유부초밥 월드의 언어 실험

나이 서른셋이 되며 먹는 감정의 서른세 끼
#불편함



유부초밥 월드의

언어 실험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일상 속의 단어들을 비틀어 쓰거나 쓰지 않는 실험을 해온 지. 물론 그러라고 시킨 사람도, 권유한 사람도 없다. 순수하게 나의 의지로 시작되어 지속하고 있는 실험일 뿐이다. 언제부터 시작해왔는지 생각해보면 대략 사오 년 전쯤부터로 추정된다. 공교롭게도 내가 유부초밥 월드로 입성한 시기와 맞물린다. 그러니까 이 일상 속 실험이라는 것은, 결혼 이후에 사방팔방에서 마주하게 되는 단어들의 불편함을 내가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회사에 다니면서 ‘집사람’이라는 호칭으로 아내를 부르는 수많은 과차장님들과 부장님들을 봤다. 개중 대다수는 맞벌이 가정을 꾸린 분들이었다. 아내가 엄연히 직장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열일을 하고 있는데, 왜 그분들이 ‘집사람’으로 불려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혹시 반려자 친구가 밖에서 나를 집사람으로 부르고 있지는 않을지도 궁금해졌다. 사회생활에선 엄연히 내가 선배인데도 고작 ‘집사람’이 돼버린 적은 없었을까 해서였다.

 그런 의문과 의아함이 여러 겹 쌓아 올려지며 실험은 시작됐다. 반려자 친구를 ‘집사람’으로 불러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니 우리 집사람이’ 하며 말을 시작하면 듣는 사람들은 대번에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당연한 반응이다. 남편을 집사람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왜 집사람이라고 부르는지 누군가 묻거든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냥 재밌잖아, 아무렇지 않은 듯 덧붙이면서.


 또 뭘 하고 있더라……. 이제 더는 ‘시댁’이라는 단어도 쓰지 않기로 했다. ‘처가’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조금 더 올려 써줘 보아야 ‘처가댁’이라는, 다소 억지스럽게 높여 쓴 단어가 되는데 ‘시댁’이라는 말은 규격처럼 통용되는 게 이상해서였다. ‘시댁’과 ‘처댁’, ‘시가’와 ‘처가’가 한 쌍이 되어야 할 것 같지만 그런 균형이 맞춰지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두 가지, 모두가 처댁이라고 불러주기를 기대하거나 내가 시가라는 명칭을 사용해 균형을 맞추거나. 후자가 효율성 면에서 압도적으로 나았고, 그렇게 생각한 뒤론 시댁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신랑’이라는 단어도 버렸다. 新郞. 한자어로 신랑을 말할 때 ‘새 신(新)’을 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랑 생일상’이라는 연관 검색어는 존재하지만 ‘신부 생일상’이라는 연관 검색어는 찾아지지 않는다는 것도. 회사에서 만난 선배들의 대화에서도 신랑이라는 단어는 곧잘 등장하곤 했다. 신랑한테 애 맡기고 잠깐 나가서 놀다 왔다거나, 고부간 갈등은 신랑이 중재를 잘해야 한다는 둥의 문장들에서. 기혼 남자 선배들의 대화에서 ‘신부’라는 단어가 오르내린 적은 있었나 잠시 골몰해본다. 없다. ‘신부 화장’ 정도를 말할 때나, 결혼 준비를 하러 다니는 곳마다 ‘신부님’ ‘신부님’ 해대서 민망했다는 소감에서 들어본 것이 전부 같다. 몇 번의 물음은 ‘신부’는 결혼 준비와 함께 탄생해 결혼식장에서 소멸하는 단어라는 깨달음으로 나를 데려다줬다. ‘신랑’이라는 단어는 왜 십수 년 전 결혼식장을 빠져나온 기혼자 사이에서도 명줄이 붙어 있는지, 그에 대한 물음표는 떼어지지 않은 채로.


 왜 ‘와이프’라는 호칭은 통용되면서 ‘허즈번드’라고는 하지 않는지, 내 남동생은 고작 처남인데 남편의 여동생은 왜 아가씨가 되어야 하는지, 떼어지지 못한 물음표들은 여전히 도처에 깔려 있다. 모르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딱히 아내의 본가를 격하시키고 싶어 ‘처가’라는 호칭을 쓰거나, 오늘도 열심히 집밖에서 일하는 아내를 지우기 위해 집사람이라고 부르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관성에 따르는 것이 가장 손쉽고, 누구나 익숙한 것이 편안하다는 게 이유의 전부일 거라는 것을. 따라서 일상 속에서 단어를 사용하지 않거나, 단어를 비틀어 써보는 일은 결코 큰 의미를 가지게 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이 실험의 숙명에 대해서도.

 다만, 어떤 파문을 만들고 싶을 뿐이다. 호숫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서 작은 돌멩이를 던져 보고 싶은 것이다. 반려자 친구를 ‘남편’이나 ‘신랑’이 아닌 ‘집사람’이라고 부를 때, 물결에 이는 파문에 작게 동요하는 눈동자를 보고 싶은 것이다. 백 번의 실험 끝에 단 한 명이라도 남성 배우자를 ‘집사람’이라고 부르는 게 어째서 그토록 이질감이 드는지 느껴준다면, 그래서 아내를 ‘집사람’이라고 부르지 않는 일에 동참해준다면……. 그런 가정법의 완성을 위해 집사람의 귀가를 기다리며 오늘도 실험을 지속한다. 실험의 숙명 같은 건 관심도 없다.*




* 마지막 문장은 너무도 좋아하는 요조 님의 에세이 「빛나는 오늘의 발견, 빛나는 오늘의 나」 마지막 문장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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