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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우유 May 30. 2022

공조팝나무와 조팝나무

구태여 벌써부터 엄마의 죽음을 예비할 이유는 없지만


“아빠가 지금 보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아빠가 눈을 조금만 돌리면 마당 창밖으로 빨간 꽃이 보이잖아? 그거 할머니야. 할머니가 거기 있으니까, 아빠가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죽음이라는 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냥 단순히 존재 양식의 변화인 거잖아. 작년 한 해 동안 내 첫 장편 영화였던 〈너와 나〉라는 작품을 찍으면서 나는 분명히 세월호 아이들이 여기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중략) 나는 이들이 분명히 죽은 뒤에도 여기 있다고…, 믿어. 그러니까 아빠, 무서워하지 말고, 마지막 시간 아름답게 잘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본디 누군가의 눈물에 쉽게 몰입하는 성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더라도 참기 힘든 순간이었을 것이다. ‘빨간 꽃’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눈물이 맺히는 것을 막지 못했다. 백상예술대상에서 수상소감을 하는 배우 조현철​의 떨리지만 무너지지 않는 목소리를 듣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올려다보고 있는 압도적인 스케일의 무대 위에 서서,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울지 않고 말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저 배우는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까 싶은 마음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흘러들어 오면서, 아빠에게 전하는 위로가 다른 이들의 마음에까지 가닿는 짙은 위로가 될 때까지 얼마나 마음이 아리고 아팠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으므로.


 돌아가신 할머니를 ‘빨간 꽃’에 빗대어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위로하고자 하는 저 여린, 다만 심지가 곧은 눈빛의 청년이 남긴 대사 중 가장 아름다웠던 부분은 단연코 ‘죽음이라는 게 그냥 단순히 존재 양식의 변화’라고 말하던 부분이었다. 뒤이어 본업인 연기자로서 세월호에 관한 영화를 찍을 때에도, 물기를 한껏 묻힌 채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자신과 함께하고 있었음을 명백히 감지했다고 말하는 부분에선 무한한 위로를 느꼈다. 이승에 있는 망자의 존재를 감지하는 것은 내 인생 내내 기이하거나 기괴한 일로만 여겨졌으나 그의 말 한 마디를 다 듣는 순간 더없는 따뜻함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조금은 이상하고 우스운 일이었다. 죽은 이가 나비나 어떤 네발짐승으로 환생한 듯한 스토리는 꽤나 구닥다리 드라마에서도 여러 번 본 것이었으니 새로울 것도 없었는데. 그간의 나는 이승을 떠난 누군가는 어떤 생명을 빌려 환생해야만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드라마 속 뉘앙스에 질려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어떤 존재는 완벽히 물성을 잃은 상태로 부재하더라도 완전히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그랬다. 그의 소감이 끝날 무렵 직감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본 사람들에게 그의 말은 한없이 따뜻한 위로인 동시에, 잃어갈 어떤 얼굴을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떠올리게 했을 거라는 걸. 내가 무조건 반사적으로 이런 상황에 우리 엄마를 떠올리듯이 말이다.


 내가 모르는 거의 모든 식물을 알고 있는 우리 엄마. 공조팝나무와 조팝나무를 구별해 낼 줄 아는* 엄마. 내가 아는 모든 한식을 맛있게 할 줄 아는 엄마.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잡채와 갈비찜과 열무김치를 누구보다 맛있게 할 줄 아는 엄마. 매년 당신 사후의 자식들을 염려하는 정성으로 내 마음 한 귀퉁이가 조금씩 닳아 없어지게 하는 엄마. 한 해 한 해 나이 들어가는, 이젠 정말 할머니가 되어버린 우리 엄마…….


 생은 경이롭고, 삶은 고단하고, 죽음은 예측을 허락하지 않는다. 구태여 벌써부터 엄마의 죽음을 예비할 이유는 없을 테지만, 이미 나는 자신이 없다.  배우처럼 눈물 흘리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엄마의 죽음을 논할 자신이. 다만  훗날 엄마가 생을 마감하는 날이 온대도 엄마는 끝끝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봄날엔 공조팝나무와 조팝나무로 존재하는 엄마를 느낄  있을지 모른다. 이십몇 해를 엄마와  닮은  알고 살았는데 모르는 사이 엄마를  남매  제일 닮아버린 내가 살아가는 것만으로 어쩌면 나는 엄마의 존재를 충실히 변주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조현철 배우의 소감을 듣는 사이 그럴지 모른다, 하는 막연하고 손아귀에 잡히지 않는 실체 없는 확신이 생겼다.


 어제는 조현철 배우의 아버지가 끝끝내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접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는 사랑하는 아들 현철이와 함께일 것이다. 오늘의 내겐 그런 슬프지 않은 확신도 생겼다.



* 내겐 그저 식물대백과사전 수준인 엄마와의 카톡. 공조팝나무는 동글동글한 송이로 보이고 빨리 지고, 조팝나무는 긴 송이로 보이고 공조팝나무보다는 생명력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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