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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상오리 Dec 15. 2022

11. 두 도시와 연애하기

[8개월 태백 살이]

  자연 속에서 평화롭게 유유자적하는 삶을 동경했었다. 태백에서의 삶은 꿈꿔왔던 모습과 어느 정도 닮아있었다. 퇴근 후엔 산책을 하고 책을 읽었고, 주말엔 태백산, 함백산을 오르고 가야금을 탔다. 바람을 쐬러 좀 멀리 가고 싶을 땐 차를 끌고 옆 동네인인 영월, 삼척으로 나가 강과 바다를 구경했다. 


직접 찍음, 태백시 구와우마을, 매년 7-8월이면 해바라기 축제가 열린다.


  어쩌면 드디어 나답게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경기도에서 태어나 자라고 20대에는 서울을 누비면서 생활했지만 그 시절이 아스라이 먼 옛일처럼 느껴졌다. 외딴곳으로 떨어진 한 알의 홀씨처럼 이곳에 뿌리내리고, 철 따라 달라지는 숲의 모습을 보고, 인적 드문 거리를 걷고, 인근 지역의 강이나 바다를 넋을 놓고 구경하고, 느리게 굴러가는 하루에 감탄하며 나이 들어가는 삶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토록 동경하던 삶인데도, 이런 생활에 익숙해지고 나자 태백에서의 삶이 단조롭고 외롭게 느껴지는 순간도 이따금씩 찾아왔다. 그때쯤에는 활력 있고 세련된 '도시 감성'에 대한 갈망이 솟아올랐다. 그 주기는 보통 2주였다.


   2주에 한 번은 가족과 친구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무궁화호를 타고 경기도 본가로 향했다. 태백에서 돌아와 보는 고향은 늘 새삼스럽게 신선했다. 코스트코, 이케아, 대형 쇼핑몰이 근처에 있는 본가 근처 거리는 생기가 가득하다. 강 하나 건너면 서울인지라 이따금 종로나 합정, 압구정 같은 곳에 나가 친구들과 만나고 돌아오면, 마치 꿈같다. 건물의 아름다운 직선과 곡선에, 화려하게 빛나는 불빛에 황홀하다. 이렇게 본가에 들러 도시에 대한 갈망을 채우고 나면 다시금 태백의 고요함과 자연이 그리워진다.


  기차로 청량리역과 태백역을 오가는 동안 창밖의 풍경은 도시에서 시골로, 시골에서 도시로 변화했다. 창밖을 보고 달리고 있으면, 정든 곳을 떠난다는 슬픔과 그리운 곳을 향해 간다는 기쁨이 동시에 다가왔다. 도시에선 자연이 그립고, 자연에선 도시가 그리웠다. 도시에 익숙해진 눈으로 자연을 보면 새삼 아름다웠고 자연에 익숙해진 눈으로 도시를 보면 그 역시 새삼 아름다웠다. 


직접 찍음, 서울숲, 건물의 황홀한 불빛




  그러는 사이 시간은 흘러 태백에서 산 지 8개월이 지났을 무렵, 인사이동 신청 공고가 떴다. 내가 근무하는 국가기관은 신규를 보통 지방 곳곳으로 발령 냈다가, 빠르면 6개월 길면 3년 정도 안에 살던 곳 근처로 돌려보낸다. 이번에 수도권에 대규모의 휴직자가 발생해 수도권 인력을 대거 충원 예정이라 했다. 지금 인사이동을 하지 않으면 몇 년은 더 기다려야 연고지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도 들렸다.


  어떤 지역을 사랑하게 되는 것도 연애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태백에 처음 도착했을 땐 그저 낯설고 긴장되기만 했다. 함께한 시간이 쌓여갈수록 태백에 점점 더 애정을 느꼈고 편안해졌다. 첫 발령지이자 처음으로 자취를 한 곳이기에, 모든 순간이 생생하고 소중했다. 태백이 그리울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고향도 그리웠다.


  그냥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모아 도시를 만들고 싶었다. 태백의 울창한 숲, 여유와 적막, 애정 하던 사람들이 있으면 좋겠고 고향의 현대적인 건물들, 활력과 도전, 사랑하는 가족과 오랜 친구들이 있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것들이 똑하고 그곳에서 떨어져 나와 합쳐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경기도으로의 인사이동을 신청했다. 경기도 내에는 수많은 지역들이 있었고, 결원 사정에 따라 어디로 발령이 날지는 불확실했지만 이동 가능성은 높다고 했다. 생각도 못했던 곳으로 굴러와 이렇게 태백과 사랑에 빠졌듯이, 그만큼 갑작스럽게 이별을 맞이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또 어디로 인생의 주사위가 굴러갈지 모르겠다.


직접 찍음, 서원주역 인근, 기차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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