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월 태백 살이]
예전에 엄마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네 언니는 혼자 살아도 잘 살 거 같은데, 너는 걱정돼. 혹시 나중에 혼자 살기라도 하면 죽어 있을 거 같아(?)" 나를 못 미더워하는 엄마의 충격발언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채 다른 가족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다들 이견의 여지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들의 반응은 당연했다. 그만큼 나는 게으른 딸이었다. 냉장고에 다른 가족이 해 놓은 반찬이 따로 없으면 식사를 건너뛰었고, 엄마의 분노에 찬 잔소리가 있기 전까지 흐트러진 방도 내버려 뒀다.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얼마나 게으를까?" 이런 의문을 한때 자주 가졌다. 내가 평균보다 많이 게으른가 아닌가 수시로 어림짐작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스스로를 보통사람의 범주에 넣고 싶어 안달이 난 전형적인 게으름뱅이의 모습이다. 그렇다. 나는 게으르다. 하지만 약간의 변명을 덧붙이자면 그건 학습된 무기력감이 가미된 게으름이었다.
가족들의 생활 방식은 내겐 다소 빨랐다.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내 모든 행동이 굼떴다 했다. 내가 느리다는 것에 대한 첫 인식은 초등학교 4학년쯤이다. 엄마가 맞벌이를 시작하시면서 삼 남매가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은 계란 프라이였다. 조리가 간단해 어린아이들도 얼마든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언니와 남동생과 함께 식사를 준비하다 보면 들고 있던 계란 프라이 뒤집개마저 빼앗겼다. 내가 계란 프라이를 하고 있으면 답답하는 것이다. 성인이 될 무렵까지 소재의 변주만 있을 뿐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뭔가가 있었으면 하는 시점에 움직이고 있으면 손이 빠른 가족들은 착착 뭔가를 만들어냈다. 언젠가부터 집은 내게 힘들여 뭔가를 해야 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엄마는 처음 내가 자취를 시작하자 그렇게 눈물을 흘리셨다. 혼자 지낼 딸의 생사 여부가 어지간히 걱정스러우셨나 보다. 엄마의 걱정과는 반대로, 이곳에서 나는 너무 잘 지냈다. 생계를 유지하려면 귀찮음을 이겨내고 느린 손길이나마 야채를 썰고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야 했고, 퀴퀴한 이불 냄새를 방지하려면 적당한 주기로 이불을 세탁기로 끌고 가 잘근잘근 빨아줘야 했다. 물때 낀 화장실에서 반신욕을 할 순 없으니 일주일에 한 번쯤은 화장실 청소도 해줘야 했다. 처음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수시로 전화를 걸어 딸의 생존신고를 듣던 엄마도 자취방에 몇 번 와본 다음에야 혼자 둬도 잘 살겠다 싶었는지 전화가 뜸했다.
나 역시도 스스로 평균보다 많이 게으른 게으름뱅이는 아님을 확인했다. 상上게으름뱅이는 아니고, 중中게으름뱅이 정도. 게으르게나마 천천히 움직이니 말이다. 아무도 느린 내 생활을 재촉하지 않았다. 집안의 모든 공기가 나의 속도에 맞춰 흐르는 느낌이다. 약간의 게으름을 이겨내는 기분이 다소 상쾌하기도 했다. 본인 속도에 맞는 집을 갖게 된다는 건, 몸에 꼭 맞는 옷을 입는 기분이다.
"부모님이랑 살 때가 좋아. 자취하면 빨래고 음식이고 설거지고 다 직접 해야 하니까 얼마나 힘들어. 지금 행복한 줄 알아." 자취하고 싶다고 하면 흔히들 이런 레퍼토리의 어른들의 조언을 듣는다. 새빨간 거짓말이니, 어깨를 으쓱하고 그냥 떨쳐버려도 된다. 혼자 사는데 집안일이 많으면 얼마나 많겠는가. 누가 감시하는 사람도 없는데 게으름 좀 피우면 또 어떤가. 특히나 집안의 속도가 본인과 차이가 나는 환경에 살고 있다면 늦기 전에 홀로서기를 시도해봐도 좋다. 가족들은 빠른데 홀로 느리거나, 가족들은 느린데 홀로 빠르거나. 뭐든 좋다.
무엇보다 내 손으로 직접 집안일을 하니 묘한 쾌감이 있다. 내 삶을 내가 직접 이끌어 간다는 쾌감이다. 직접 고른 저녁 메뉴로 밥을 먹고, 내가 원하는 시기에 필요한 옷들을 빨아 입을 수 있다. 가족들과 같이 살 때는 내 생활이 내 통제 밖인 느낌이었다면, 이젠 내 손안에 내 삶을 꽉 잡은 느낌이다. 내가 원하는 방향 내가 원하는 속도대로 하루가, 일주일이, 한 달이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