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회사에서 삐딱하고 비협조적인김 환장 씨와 업무로 한바탕 언쟁을 벌인 후에, 씩씩거리며 열을 식히러 동료와 커피를 마시러 갔다.맞장구를 치며 같이 욕해주던 동료가 나를 위로하며 던진 한마디.
"그 인간은 같은 노비끼리 왜 그런데?"
그렇다. 같은 노비. 내가 그에게 화가 난 이유를 정확하게 짚어낸 말이었다. 연차만 조금 다를 뿐인 똑같은 노비 신분인데 누가 누구에게 꼰대 짓을 하고 명령을 한단 말인가?
"직장인은 현대판 노예, 시간제 노비다."
10년 차 직장인으로서 이 말을 안 들어본 건 아니지만, 갑자기 내가 처한 상황에서 그 단어를 듣자 뭔가 묘하게 그 단어에 주의가 집중되었다. 물론 나를 위로하려고 그 사람을 비난하려 한 말이지만, 위로되는 동시에.. 왜 나 슬퍼지는 거니? 그 날 이후로 "대기업 노비"라는 단어는 나를 뺀 나머지를 향한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에서 나 자신을 정조준한 불편한 단어가 되어있었다.
노비. 소중한 내 인생을 위해, 커리어를 멋지게 키워나가는 나 같은 프로페셔널에게 가당키나 한 단어인가?
노비라.. 내가 아는 그 노비? 혹시 다른 뜻이 있을 수도? 나무 위키에 노비를 쳐보았다. 노비의 뜻과 역사 속에서 노비제도와 사회문화에 대한 내용이 나열된 후, "미래에 노비제가 부활할 가능성이 있는가?"라는 소제목이 있다. 그에 대한 답변.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2항은 다음과 같다. 사회적 특수계급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
W.H.A.T? 뭔 소리야 이미 부활했다고!
제도가 다 무슨 소용?! 현실에서 특권층은 버젓이 존재하고, 흙수저와 금수저, 유주택자와 무주택자 등 신분은 그 강을 건널 수 없을 만큼 벌어졌는데.. 멍청한 노비를 안심시키려는 듯한 답변을 보자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생각해보자. 나는 집도 있고, 차도 있고, 1년에 한 번씩은 해외여행도 간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다니고, 가끔 피부관리도 받고, 백화점에서 명품도 산다. 하지만 아침이면 졸린 눈 비벼가며 억지로 출근을 하고,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지 일절 모르겠는 일들로 하루의 대부분을 채운다. 가장 행복한 요일은 금토일, 가장 행복한 시간은 퇴근 후, 가장 행복한 장소는 회사를 뺀 모든 곳이다. 내 무의식은 이제 인정하라며 갖가지 증거를 들이민다. 그렇다. 언제까지 따박따박 들어올지 모를 월급에 의존하며 내 시간의 대부분을 헌납하기로 계약한, 삶의 방식은 옛날보다 조금 더 세련된 노비. 맞다 내가 그 대기업 노비다. 머리가 하얀 50대 부장님, 갓 입사한 막내 30세 사원 너나 할 것 없이 연식이 다른 노비 들일뿐.. 허무함이 밀려오는 가운데.. 아 잠깐.. 근데 내 눈에 이거 눈물? 스스로 노비라고 하는 건 좀 많이 슬프잖아?
냄비 속 개구리, 그 이름은 직장인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했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우리가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라고 했다. 그래. 노비라는 말은 집어치우자. 이미 운명이 결정된 것 같으니까. 신분 사회, 계급 사회는 맞지만 이미 다 결정되어버린 듯이 말하지 말자! 말이 습관이 되고 그게 운명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나를 지탱해줄 조금은 덜 센 단어를 찾아보자. 답답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응원이 되어주는 말. 그게 뭘까?
내가 고시 준비를 포기하고, 취업 준비를 시작할 때 그 막막한 심정을 토로하자 친구가 한강에 돌을 던지며 무심하게 함께 던져 주었던 말.
"원래 개구리가 주저앉아있는 건 멀리 뛰기 위해서라잖아. 잘 될 거야."
담담한 그 말이 큰 위로가 되었던 그 당시가 떠올랐다. 개구리. 좋다. 점점 온도가 올라가는 냄비 안에서 뚜껑을 날려버리고 날아갈 준비를 하는 개구리. 내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면서도 도약을 꿈꾸는 희망이 담긴!
스스로 현대판 노비라고 생각한다면, 당장 생각을 바꿔라. 신분 사회는 맞지만, 노비라고 인식하는 순간, 당신은 노비의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스스로를 개똥이, 언년이로 생각한다는 것은 너무 슬프지 않은가? 대신 이렇게 생각하라. 우리는 개구리다. 단, '끓는 물속 개구리'.
당신의 무지개 연못을 찾아서
비바람이 몰아쳐도 이겨내고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라~♬ <개구리 왕눈이 OST 중>
미지근한 물에 개구리를 넣고 끓이면 물이 뜨거워져도 자신이 끓여지는지도 모르다가 죽는다. 직장인의 모습과 꼭 닮아있지 않은가? 자 이제 선택지를 생각해보자. 끓는 냄비에서 생존하는 법. 냄비를 떠나던지, 물이 끓든 식든 죽지 않는 슈퍼 개구리가 되던지, 아니면 개구리에서 냄비 주인으로 변신하던지! 아무 생각이 없다면, 물이 점점 끓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뚜껑 한번 헤딩해보지 못하고 천천히 죽어갈 것이다.
현실 인식이 되었다면, 이제는 변신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3억 년간 몇 번의 대멸종까지 거치며 살아남은 생존왕, 위장술의 왕이 개구리다. 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