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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리 Jan 09. 2017

결핍과 사랑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젠 알아요, 너무 깊은 사랑은 외려 슬픈 마지막을 가져온다는 걸’     


익숙한 문구일 것이다. 지나간 세월에 닳고 닳아 빛바랬지만 스러지지 않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린 노랫말이다. 가슴이 사무치도록 아픈 사랑은 다시 생각해보면 사랑이 아닐 수도 있음을, 너무 깊은 사랑은 역설적이게도 비극적인 마지막을 가져올 수 있음을 말하는 이 가사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큰 공감을 보낸다.    

 

우리는 왜 사랑을 할까? 사람은 타인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 이유는 충분하지 못하다. 슬프고 아픈데도, 피가 철철 흐르는 손에 꼭 쥐어진 인연의 끝자락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은 노래에도, 영화에도, 드라마에도,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도 적지 않게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누군가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가까운 자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인간은 탄생부터가 결핍의 시작이다. 자신의 유일한 세상이었던 따뜻한 모체에서 빠져나와 차디찬 바깥의 공기를 마주하는 순간부터, 생은 결핍에서 출발한다. 결핍으로부터 태어난 우리는 일생동안 그 텅 빈 허전함을 가슴속 어딘가에 가지고 살아간다. 결핍을 느끼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혼자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있고, 자신과 함께해줄 타인의 부재를 못 견뎌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따금씩 어떤 불안도 없이 고독을 즐기던 사람도 큰 해일을 맞이하듯 외로움의 심연에 잠겨 타인의 존재를 숨처럼 찾게 되기도 한다. 자신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도 충분히 메워지지 않는 그 공허함을, 인간은 타인의 존재를 통해 채우고자 한다. 그런 욕구는 그렇게 삶의 전제조건처럼 자리 잡는다.     


그런 이유로, 사람은 사랑을 한다.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 대화해보기도 하고 속마음을 건너보기도 하면서, 제 마음속에 빠져있는 톱니가 이 사람과 꼭 맞물릴지 가늠해 본다. 그리고 운이 좋다면 딱 맞물리는 톱니를 만나고,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그 순간은 너무나 행복하다. 결핍에서 태어나 한 번도 채워지지 못했던 만족감이 가슴 벅차도록 뜨겁게 차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핍된 인간의 판단에 완벽함이란 있을 수 없기에, 우리의 결정에는 항상 판단의 오류가 동반된다. 꼭 맞물린다고 생각했던 톱니가, 실은 잘못 끼워 맞춰져 불쾌한 소음을 내며 일그러져 가고 있는 것이다. 같이 맞물려 나아가려 하면 할수록, 그 형태는 더욱더 어그러진다. 뒤늦게 빼보려고 하지만 일그러진 채 서로 얽힌 톱니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고 그래서 섣불리 빼낼 수 없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비뚤어진 맞물림으로 벼랑 끝을 향해 걸어가고 있음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멈출 수가 없다는 것.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졌음에도 그 잘못을 쉬이 뽑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 이 톱니를 빼내면 또다시 영원한 결핍의 상태로 돌아가 마주하게 될 공허감이 두렵기 때문이다. 끝없이 삐걱거리고 휘청거릴지라도 내려놓을 수 없다. 이 사람 없이는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질 것만 같은 그 두려움이 두 사람을 위태로운 외줄 위에 서있게 만든다. 그리고 이 위태로움은 어떤 열망에서 비롯된다. 일종의 생의 열망 같은 것.     


한 우화가 있다. 인간은 원래 두 사람이 한 몸이었던 존재라는. 두 개의 머리와 두 개의 심장을 가진, 결핍을 모르는 완성된 존재. 완전한 그들은 두려울 것도, 동경할 것도 없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뜨거운 심장들에는 각각 오만과 배덕의 싹이 움텄다. 그걸 두고 볼 수 없었던 신은 태초의 인간을 심판했고 인간은 둘로 갈라졌다. 그리고 반쪽을 잃은 그 상태가 바로 지금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너무도 불완전한 그 상태는 필연적으로 불안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무의식 저편에서부터 기억도 나지 않는 태초의, 결핍을 몰랐던 완벽한 삶으로 회귀하려는 열망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선 함께 나란히 품을 맞대고 심장의 고동을 공명할 상대를 만나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한다. 상처가 붉게 방울방울 맺히는 사랑을 한다. 그렇게 완성을 추구하지만 영원히 완성될 수 없다. 외롭게 뛰는 하나의 심장과 그 아래를 쓰다듬으면 만져지는 오목한 흔적이 결핍의 영원한 흔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완벽을 추구하는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 반면 결핍에 머무르는 것에는 불안이 존재한다. 둘 중 더 나은 선택지란 무엇일까?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을까? 알게 되더라도 행동할 수 있을까?    

 

노랫말을 가만히 되뇌어본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이미 생생하게 겪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을 수 있고, 너무 깊은 사랑은 외려 슬픈 마지막을 가져온다는 것도 알았을 테다. 하지만 나는 여기저기 생채기로 얼룩지고 깊고 깊은 심연으로 침잠하는 것 또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든 과정이 혼자가 된 인간이 온전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소중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밝은 빛을 두 눈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된 인간은 여전히 완벽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스스로의 빈 공간을 조금씩 채워나가는, 결핍을 인정하고 그것을 불안해하지 않는 성숙한 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어쩌면 사랑은 인간이 타인을 만나 하나가 됨으로써 결핍을 메우고자 하는 행위가 아니라, 타인과의 만남으로 정제되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 부족한 자기 내면을 스스로 오롯이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용기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결핍에 쫓겨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결핍을 인정하게 되는 모든 과정으로서 사랑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동반되는 아픔과 우울을 긍정한다.     


그러니 우리는 사랑을 하자.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고 완벽할 필요도 없다. 먼 옛날엔 나란히 곁에서 뛰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고요한 고동소리가 전해지는 두 손을 맞잡아보며,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사랑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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