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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멘토 Mar 08. 2017

10 나의 길을 가련다: 소크라테스 4

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고발당한 철학자


후세에 존경받는 사람이 동시대 사람에게는 ‘불편한 존재’였던 경우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그랬다. 젊은이들이야 소크라테스와 어울려 대화하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를 의식하는 ‘어른들’은 사정이 달랐다. 어른들은 소크라테스의 대화 스타일을 흉내 내는 젊은이들이 심기에 불편했다. “우리 애는 참 착한 애였는데…… 글쎄, 그 괴짜랑 어울려 다니더니 이상해졌다니까.” 

아테네는 백가쟁명의 다양한 담론이 넘쳐난 도시국가였다. 소크라테스의 괴짜 행각이 허용된 것도 그 덕분이다. 그러나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면 여유와 관용을 잃고, 농담 한 마디를 잘못 해도 눈총을 받는 법이다. 아테네와 그 동맹국들, 그리고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이 맞붙어 싸운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404)이 아테네의 굴욕적인 패배로 막을 내렸다. 그러자 가장 훌륭한 폴리스의 시민임을 자부하던 아테네인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사람들은 누군가 탓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들의 눈에 ‘신들을 믿지 않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소크라테스가 들어왔다.  

이때는 하필 소크라테스와 가까이 지내던 이들이 아테네의 적이 된 후였다. 아테네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된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15년 군대를 이끌고 시켈리아로 출정했다가, 국내 정세가 자신에게 불리해지자 적국인 스파르타로 투항해버렸다. 알키비아데스뿐만이 아니었다. 전쟁이 끝난 기원전 404년, 스파르타의 정치체제에 우호적이었던 아테네인들이 스파르타의 비호 아래 민주정을 뒤엎고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이것이 바로 30인 참주정이다. 문제는 30인 가운데 소크라테스의 추종자 두 명이 끼어 있었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친척이기도 했던 (그리고 대화편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의 주인공인)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가 그들이다. 

403년에 30인 참주정이 전복되고 다시 민주정이 회복되었지만, 사람들은 아테네의 민주정이 침탈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했다. 소크라테스가 고발당한 사건(BC 399)은 전쟁이 끝나고 불과 5년 후에 일어났다. 고발자는 멜레토스, 아뉘토스, 뤼콘 세 사람이었다.      


이상한 변론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스스로 변론을 했다. 자기가 무죄라는 걸 밝히려면 고발 내용을 반박해서 그것이 허위라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의 변론 내용에서 고발에 반박하는 대목(<변론>, 24b-28b)은 얼마 안 된다. 마치 이런 건 핵심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고발장에 기술된 이런저런 죄목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방식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해서 법정에 서게 되었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는 배심원들의 동정을 얻으려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철학 활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엉뚱한 말을 꺼낸다.      


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여, 그래, 그대는 이런 일에 종사하다가 그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위험에 처한 걸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 게요?’(<소크라테스의 변론>, 28b.)      


사실 이건 법정에서 할 얘기는 아니다. 배심원들은 사실 관계를 정확히 해명하는 피고의 변론이 듣고 싶지 심경고백은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는 죽음을 앞둔 철학자가 스스로에게 던진 물음으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자네 말이 옳아, 소크라테스. 자네에겐 죄가 없지.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사형이야. 철학을 한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들쑤시고 다니다가 이렇게 됐지 않나. 정말 후회는 없나?”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건 결국 자네가 너무 주제넘은 탓이 아니냐는 걸세. 그게 죄라고 할 수야 없겠지만, 현명하지는 못했지 않나?”  

   

그럼 저는 그에게 올바른 답을 할 것입니다. “이보시오. 말 잘 못하고 있는 겁니다. 뭔가 조금이라도 쓸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하면서 자신이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있는지 불의한 일을 하고 있는지, 훌륭한 사람의 행동을 하고 있는지 못난 사람의 행동을 하고 있는지만 따져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의 위험을 계산에 넣어야 한다고 당신이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당신의 바로 그 주장대로라면 반신(半神) 영웅들 가운데 트로이아에서 삶을 마친 사람들이 형편없는 사람이 될 테니까요.”(<소크라테스의 변론>, 28b-c.)  

   

“트로이아에서 삶을 마친 사람들”이란 <일리아스>의 영웅들을 가리킨다.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아킬레우스를 소환한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만 특히나 테티스의 아들이 그렇지요. 그는 수치스러운 어떤 일을 참고 견디는 것에 견주어 그 위험을 아주 가벼이 여겼지요. 그래서 여신인 어머니가 헥토르를 죽일 작정을 하고 있는 그에게, 내가 기억하기로 대략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즉 ‘얘야, 네가 동료 파트로클로스가 당한 죽음에 대해 복수를 해서 헥토르를 죽이게 되면, 너 자신이 죽게 된다. 헥토르 다음에 죽을 운명이 곧바로 너에게 예비되어 있단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 말을 듣고도 죽음과 위험은 사소하게 여긴 반면, 비겁한 사람으로 살게 되는 일과 친구들을 위해 복수하지 못하는 일을 훨씬 더 무서워해서 이렇게 말했지요. ‘곧바로 죽어도 좋습니다. 불의를 행한 사람에게 대가를 받아낸다면 말입니다. 그래야 여기 구부러진 배 곁에서 비웃음의 대상으로, 대지의 짐으로 남아 있지 않게 되겠지요’라고 말입니다. 설마 그가 죽음과 위험에 신경을 썼다고 당신은 생각합니까?”(<소크라테스의 변론>, 28c-d.)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아킬레우스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아킬레우스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운명을 맞닥뜨리게 되었지만 꿋꿋이 자기 길을 갈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다른 점이 있다. 아킬레우스는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명예는 자신의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획득할 수 있다. 그 때문에 호메로스의 인물들은 타인에게 받는 평가를 중요하게 여겼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외적인 부분과 구별되는 내면의 영혼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삶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타인의 인정이나 평판과 상관없는 길을 걸었다. 그는 자신의 변론이 배심원들에게 아부하지도 않고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은 채 진리 자체만을 드러내는 것이라 공언했는데, 사실 이것은 영혼을 돌보라는 자신의 가르침을 변론을 통해 실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누가 심판자인가 


재판 이후, 소크라테스의 오랜 친구인 크리톤은 믿을 만한 지인들과 소크라테스의 탈옥 계획을 짰다.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그러나 계획의 실행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소크라테스였다. 몇 번이고 얘기했지만 소크라테스는 탈옥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형 집행일이 다가오자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한 크리톤이 날이 밝기 전에 감옥을 찾아갔다. 그리고 온갖 이유를 늘어놓으면서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크리톤과 대화를 나누다가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어떤 판단기준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지를 논한다. 크리톤에게는 ‘많은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했다. 당시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이 간수를 매수해서 탈옥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달아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오히려 돈을 써서 그를 탈출시키지 않은 친구들을 비난할 것이라고 염려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그 판단기준부터 다시 검토한다.      


자크 루이 다비드, <소크라테스의 죽음>, 1787년


소크라테스  그런데 여보게, 크리톤! 왜 우리는 다수의 판단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 건가? 우리가 더 주목할 만한 아주 훌륭한 사람들은 우리가 한 일을 있는 그대로 생각할 것이네.

크리톤  하지만 소크라테스, 불가피하게 다수의 판단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을 자네는 물론 알고 있네. 바로 현재의 자네 상황은 이 점을 분명히 해 주네. 다수의 사람은, 자신들 앞에서 누군가가 비방거리가 되어 온 경우 이 사람에게 가장 작은 해가 아니라 사실상 가장 큰 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네.(<크리톤>, 44c-d.)   

  

대중정치가 행해지는 아테네에서는 당연히 다수의 판단으로 중요한 사안들이 결정되었다. 소크라테스는 판단 주체가 다수인지 소수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주체가 해당 분야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여기서 관건은 그 판단이 나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그 판단은 나 자신을, 더 정확하게는 내 영혼을 돌보는 데 도움이 되는가? 소크라테스는 먼저 신체를 돌보는 경우를 예로 들어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  체육을 하는 사람과 이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칭찬과 비난과 판단에 주의를 기울이는가, 아니면 오직 의사나 체육 선생 한 사람의 판단에 주의를 기울이는가?

크리톤  오직 한 사람의 판단이지.(<크리톤>, 47b.)     


야구선수가 타격자세를 교정할 때 관중들의 투표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전문 지식이 많은 한 사람, 곧 타격코치와 상의한다.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코치의 판단이 그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소크라테스  만일 그가 그 한 사람에게 복종하지 않고 그의 판단과 칭찬을 존중하지 않은 채, 전혀 전문 지식을 갖지 못한 다수의 판단과 칭찬을 존중한다면, 그는 나쁜 일을 겪지 않겠는가?

크리톤  어찌 겪지 않겠는가?

소크라테스  그 나쁜 것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어디에, 그러니까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의 어떤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가?

크리톤  분명 몸에 영향을 미치네. 몸을 망치니까.(<크리톤>, 47c.)     


허리를 어떻게 움직여야 체중 이동이 부드럽게 되는가 하는 문제는 다수의 의견이 아니라 전문가의 견해에 따라야 한다. 잘못된 타격 자세는 몸에 영향을 미친다. 타격 능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몸 전체를 망가뜨릴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듯 몸을 돌보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 다음, 영혼을 돌보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  우리가 지금 숙고하고 있는 정의로운 것과 불의한 것,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 좋은 것과 나쁜 것과 관련해서 살펴보게. 이것들과 관련해서 우리는 다수의 판단을 따르고 이것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아니면 한 사람의 판단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 밖의 모든 사람 앞에서보다도 그 앞에서 더 부끄러워하고 더 두려워해야 할, 전문 지식을 가진 어떤 사람이 있다면 말이네. 우리가 그의 판단을 따르지 않는다면, 정의로운 것에 의해서는 더 좋게 되고 불의한 것에 의해서는 파멸된다고 하던 대상을 파괴하고 손상시킬 것이네.(<크리톤>, 47c-d.)      


정의/불의, 아름다움/추함, 좋음/나쁨은 가치의 문제다. 소크라테스는 어떤 행위가 정의로운지, 아름다운지, 좋은지를 고찰할 때에도 다수가 아닌 전문가의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좀 의아하다. 윤리 문제에도 전문가가 있을까? 더구나 소크라테스 자신도 질문만 했지 똑 부러진 대답을 내놓지 않은 상태로 대화를 끝내기 일쑤였잖은가.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 후에 자신이 전문가라고 자처하지도 않고 다른 누군가를 언급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윤리적 가치의 문제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판단할 일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잘못된 자세가 몸을 망치듯이, 잘못된 행위는 영혼을 망치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것에 의해서는 더 좋게 되고 불의한 것에 의해서는 파멸된다고 하던 대상”이란 곧 영혼을 가리킨다.      


탈옥은 정당한가     


이제 소크라테스는 크리톤과 ‘탈옥하는 것이 정의로운지’의 여부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크리톤이 토론을 잘 따라오지 못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법률을 의인화하여 가상의 대화상대로 삼고 스스로 토론을 진행한다. 그는 탈옥의 정당성 문제에 관한 몇 가지 논변을 제시하는데, 여기서는 가장 중요한 것만 살펴보기로 하자. 

고대 폴리스는 오늘날처럼 강한 소속감을 강요하지 않았다. 아테네에는 시민들이 원하면 언제든 아테네를 떠나 다른 폴리스로 이주해서 살 수 있다는 법이 있었다.      


아테네 법률  당신들 가운데 누구라도 우리가 판결을 하는 방식이나 그 밖의 일들에서 나라를 경영하는 방식을 보고서도 머물러 있다면, 이미 그는 우리가 명하는 것들을 이행하기로 그런 행위에 의해 우리와 합의한 것이라고 우리는 말하오.(<크리톤>, 521e.)      


소크라테스는 70 평생을 아테네에서 살았을 뿐만 아니라, 몇 차례 전투에 참가했던 것 외에는 아테네를 떠나본 적이 없다. 즉 이는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법률과 제도에 동의했다는 것을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제 배심원들이 부당한 판결을 내렸다는 이유로 자신이 법을 어기고 달아난다면 그것은 자신이 합의한 바를 스스로 깨뜨리는 것이자 자기 자신의 원칙을 파기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아테네 법률  당신은 가장 하찮은 노예가 할 법한 일을 하고 있소. 당신은 시민으로 살기로 우리와 맺은 계약과 합의에 어긋나게 달아나려 하니 말이오.(<크리톤>, 52d.)      


<구름>의 페이딥피데스는 아버지들이 만든 법에 따르는 것은 자유인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스스로 맺은 계약(synthēkē)과 합의(homologia)를 따르지 않는 것은 자유인답지 못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합의한 바를 지키는 데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이렇게 하여 소크라테스는 탈옥을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후 그는 크리톤에게 다시 묻는다.     


소크라테스  자네가 뭔가 더 해볼 게 있다고 생각한다면, 말해 보게.

크리톤  소크라테스, 나는 할 말이 없군. 

소크라테스  그러면 이쯤 해 두게, 크리톤. 신께서 이렇게 인도하시니, 그대로 하세나.(<크리톤>, 54d-e.)

     

이틀 후, 소크라테스는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독배를 마시고 죽는다. 플라톤에 따르면, 그가 독배를 입에 대는 순간 친구들은 슬픔을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소크라테스는 “소란 피우지들 말게” 하고는 조용히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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