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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멘토 Jun 01. 2017

22 운명을 받아들이기: 스토아 학파 2

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거대해진 세계    

 

자연에 따르는 삶을 택한 퀴니코스 학파는 폴리스의 관습적 규범들을 경시하면서 세계시민을 자처했다. 스토아 학파 역시 이런 경향을 이어받았다. 시대적 상황 역시 이런 경향에 일조했다. 스토아 학파가 활동하던 시대는 고전적인 폴리스 체제가 붕괴되고 거대 제국들이 지중해 유역을 장악하기 시작한 때였기에 세계 인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스토아 학파가 그린 세계는 마케도니아나 로마와 같은 현실세계의 거대 제국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성적인 피조물들의 목적은 가장 오래된 국가의 이성과 법규를 준수하는 것이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2:16)     


이것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인데, 여기서 “가장 오래된 국가”란 단지 오랜 역사를 지닌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전체, 곧 우주를 뜻한다. 국가에 일정한 질서와 법규가 있듯이, 자연 전체도 질서와 법규를 지니고 있다. 스토아 학파의 기본 준칙은 이성을 지닌 피조물은 자연의 법규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연 전체로 확대된 세계 인식은 자아의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내가 한낱 작은 폴리스의 일원이 아니라 거대한 우주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나의 자의식을 고양시켜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자의식을 축소시키는 일이기도 했다. 섬마을 학교에 다니던 아이가 큰 도시로 전학을 가게 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섬마을 학교라는 작은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아이는 공동체에서 적잖은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큰 학교로 옮겨간 후에는 거대한(!) 집단에 파묻힌 채 자신의 존재감을 잃어버리게 된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확장된 만큼 자기 자신은 쪼그라드는 것이다. 폴리스 체제를 벗어나 거대 제국의 백성이 된 이들이 겪은 변화도 이와 비슷했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글 곳곳에서 왜소한 자의식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네가 그것의 가장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전 실체를 생각하고, 그중 짧은 순간에 불과한 기간만이 너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이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운명을 생각하라. 너는 그것의 얼마나 작은 부분인가?(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5:24)     


거대한 우주 안에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적다. 예로부터 시인들은 내 맘대로 안 되는 것, 내 지배력 밖에 있는 것을 ‘운명’이라 칭했다. 세계가 거대해지고 개인이 한없이 왜소해져 일개 부품이 되어버린 시대에 스토아 철학자들은 다시 운명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크뤼십포스가 <운명에 관하여>에서, 포세이도니오스가 <운명에 관하여> 2권에서, 또 제논이, 그리고 보에토스가 <운명에 관하여> 1권에서 말하는 바에 따르면, 모든 일은 운명에 따라 일어난다. 운명이란 존재자들의 연결된 원인, 또는 우주를 인도하는 이치(logos)이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이름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7:149)

     

호메로스 이래로 시인들은 늘 운명을 노래해왔다. 그런데 스토아 철학에 와서 운명은 의미의 변화를 겪는다. 이제 운명은 아킬레우스나 파트로클로스 등 개인의 삶을 제약하는 특정한 조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를 규제하는 이치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운명은 ‘막연하고 맹목적인 어떤 힘’이 아니라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우주의 질서’를 뜻하게 되었다. 운명은 원인들의 연쇄다.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다시 다른 원인과 연결되어 있다. 이 원인의 총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바로 운명이다. 이렇게 보자면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개별적인 사건들은 전부 운명의 그물망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태곳적부터 너에게 미리 정해져 온 것이다. 그리고 원인들의 연쇄는 태곳적부터 네 존재와 이 일의 발생을 함께 엮어놓았던 것이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10:5)     


에픽테토스가 장애인이 된 사연에 대해 전해지는 일화는 (사실인지 여부는 접어두더라도) 스토아 철학자들의 운명관을 보여주고 있다. 노예로 지내던 시절에 에픽테토스는 주인에게 고문을 당했다. 주인이 에픽테토스의 다리를 비틀자 그는 “그렇게 비틀면 부러지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주인이 아랑곳 않고 계속 그의 다리를 비틀어 결국 다리가 부러지자, 에픽테토스는 “그것 보십시오. 부러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했다는 것이다. 

에픽테토스

그는 왜 화를 내기는커녕 그토록 태연자약했을까? 이 일이 이미 운명으로 예정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름에 날이 더운 것은 당연하니 화를 내봤자 아무 소용없듯, 그는 자신이 겪은 불행도 운명으로 정해진 일이라고 믿었다. 자연법칙이 날씨를 지배하듯이 운명이 모든 사건을 지배한다. 이런 의미에서 운명은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 할 신의 섭리와 같다.     

 

너는 작가의 뜻에 따라 배역이 정해지는 연극배우라는 점을 기억하라. 작가가 짧기를 바란다면 그 연극은 짧고, 길기를 바란다면 그 연극은 길다. 만일 그가 너에게 거지의 역할을 하기를 원한다면, 이런 역할도 능숙하게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만일 그가 절름발이를, 공직 관리를, 평범한 사람의 역할을 맡기려 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17)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를 무대에 올린다고 해보자. 안티고네 역할을 맡을지, 크레온을 맡을지, 아니면 파수꾼을 맡을지는 배우가 아니라 작가/연출자가 결정할 일이다. 극의 마지막에 안티고네가 어떤 운명을 맞을지 결정하는 것도 작가의 권한이다. 이렇게 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작가인 신의 뜻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좋은 것나쁜 것무관한 것     


시인들이 말해왔던 운명이란, 스토아 철학자들에 따르면 곧 자연의 이법(理法)이다. 그러니 운명에 복종하는 것은 곧 자연에 합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인간에게 맞지 않는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소에게는 소에게 맞지 않는 사건이 일어날 수 없고, 포도나무에게는 포도나무에게 맞지 않는 사건이 일어날 수 없으며, 돌에게는 돌의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 사건이 일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각자에게 통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인데 어째서 너는 네 운명에 불만인가? 보편적 자연은 너에게 네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은 가져다주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46)     


그러나 이 말은 아직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다. 인간은 살면서 많은 불행과 고통을 겪는다. 그렇다면 불행이나 고통도 인간의 본성에 어울린다는 말인가? 신체가 상하고, 병이 들고, 모욕을 당하는 일도 운명에 따라 예정된 것이라면 이런 일 또한 인간의 본성에 맞는가? 더군다나 불행과 고통은 선한 사람도 피해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선한 사람이 고통을 겪는 것이 자연스러우며 이것이 자연 전체의 질서에 속하는 일이란 말인가? 안티고네가 오빠의 장례식을 행한 대가로 지하 감옥에 갇혀 죽은 것이 안티고네의 본성에 어울리는 일이었단 말인가?     

  

전체의 본성이 무능하거나 서투르기 때문에 선인과 악인에게 아무 구별 없이 똑같이 선과 악이 주어지게 하는 과오를 저지른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죽음과 삶, 명성과 불명예, 고통과 쾌락, 부와 가난, 이 모든 것은 선인에게도 악인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며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다. 따라서 이런 것들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2:11)     


사람들이 흔히 ‘좋은 것’, ‘나쁜 것’이라고 칭하는 것들, 아리스토텔레스가 ‘외적인 좋음’이라고 칭한 것들을 스토아 학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들’로 간주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것들을 세 부류로, 즉 영혼의 좋음, 육체의 좋음, 외적인 좋음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영혼의 좋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 육체의 좋음이나 외적인 좋음도 행복을 위해 기여한다고 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는 이런 어정쩡한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보자면) 내면의 덕, 곧 영혼의 좋음만이 유일하게 좋은 것이다. 그리고 내면의 악덕, 곧 영혼의 나쁨만이 유일하게 나쁜 것이다. 그 외 나머지 것들은 ‘무관한 것들’, 곧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들’이다.   


이를테면 어떤 옷을 입느냐는 안티고네에게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느냐 하는 것도 안티고네에게는 좋고 나쁨과 무관한 일이다. 심지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도 역시 무관한 일이다. 오직 안티고네의 내면의 덕, 이를테면 안티고네의 용기만이 참으로 좋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에 좋은 것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의 관심사는 ‘최고선’이다. 스토아 학파는 최고선이 아니라 ‘최소선’을 묻는다. 최소한의 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은 무엇인가? 이것이 스토아 학파가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절대 잃어버릴 수 없는 것, 잔혹한 운명을 만날 때에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내면의 덕이었다.        


질병은 육체에 장애가 되지만, 도덕적 원칙에 대해서는, 이것이 스스로 허락하지 않는 한, 그것에 대해 장애가 되지 않는다. 절름발이는 다리에 장애가 되지만, 도덕적 원칙에 대해서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너에게 닥치는 모든 일에 대해 그렇게 말하라. 너는 그것이 어떤 다른 것에 장애가 될 뿐, 결코 너 자신에게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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