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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멘토 Feb 15. 2017

07 왜 아빠를 때리면 안 되나요?: 소크라테스 1

나를 위한 고대윤리학 입문 by 박정민(연구공간 환대)

말의 시대


니케라토스의 아버지는 아들을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암송하게 했다. 일종의 고전교육이다. 고전교육에서 훌륭한 사람의 이상으로 상정하는 것은 아킬레우스나 헥토르 같은 영웅들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BC 469-399)가 살았던 무렵에는 아테네의 교육 풍조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아테네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예술 장르는 연극이었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당시의 교육 세태를 풍자한 작품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기원전 423년에 공연된 희극 <구름>이다. 이 극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등장한다. 아버지 스트렙시아데스는 아들 페이딥피데스를 학원에 보내려고 한다. 아버지는 자기가 들은 소문을 바탕으로 어떤 학원의 선생들이 얼마나 훌륭한지 신이 나서 전해준다.         


스트렙시아데스  그분들은 돈만 내면 말로 이기는 법을 가르쳐준단다. 옳든 그르든 말야!( <구름>, 98-99행)     

창과 칼이 아닌 말로 이기는 법이라. 이게 뭐라고 돈까지 내고 배워 오라는 걸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시대적 배경이 있다. 고대 희랍의 폴리스(도시국가, polis)는 소수의 권력자들이 지배하는 과두정(oligarchia), 자력으로 권력을 획득한 독재군주가 지배하는 참주정(tyrannis), 시민이 직접 지배에 참여하는 민주정(dēmokratia) 등 다양한 정치체제에 따라 운영되었다. 아테네는 대표적인 민주정 국가였다. 폴리스의 중요한 정책은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民會, ekklēsia)에서 토론과 투표를 통해 결정되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세월호 선체를 어떻게 인양할 것인가,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THAAD)를 배치할 것인가 등의 문제를 시민들이 직접 결정한 것이다. 민회는 원칙적으로 모든 시민에게 열려 있었기에, 누구라도 설득력 있게 말을 잘 하면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폴리스의 정책을 이끌고 갈 수 있었다.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

말로 설득하는 능력이 중요하게 사용된 또 다른 공간은 법정이다. 아테네의 법정은 민회와 마찬가지로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시민법정이었다. 판사 없이 시민들 중에서 제비뽑기로 선출된 배심원들이 판결을 내렸다. 변호사도 따로 없어서 소송에 얽힌 시민들은 스스로를 변론했다. 검사도 없었다. 누군가 공동체에 해악을 끼친다고 여겨지면 어떤 시민이든 그에 대해 기소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런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심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연설 능력이 아주 중요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시대가 적을 쓰러뜨리는 능력이 중시되는 창과 칼의 시대였다면, 소크라테스의 시대는 동료 시민들을 설득하는 능력이 중시되는 (logos)의 시대였다. 사회에서 힘을 행사하는 중요한 수단이 말이었으므로 성공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을 잘 하고 싶어 했다. 수요가 있으면 공급이 생겨나는 법. 말 잘 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사들도 등장했다. 이 무렵에 등장한 최초의 직업교사들을 ‘소피스트’라고 한다. 이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실용적인 학문과 기술을 가르쳤는데, 최고의 인기과목은 바로 변론술(연설술, rhētorikē), 곧 말로 설득을 하는 기술이었다. 이러한 교육 풍조로 미루어볼 때, 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인들이 훌륭한 사람의 이상으로 삼은 것은 ‘토론과 설득을 통해 공동체의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민주 시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상한 선생   

  

칼이 요리에 쓰일 때는 편리한 물건이지만 강도질에 쓰일 때는 흉악한 물건이 되듯이, 말로 설득하는 능력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유익하기도 하고 해로운 능력이 되기도 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구름>은 실은 변론술의 부작용을 경고하는 희극이다. 

허영심 강한 아들 페이딥피데스는 승마에 미쳐 가산을 탕진했다. 아들이 날려먹은 돈 때문에 집은 파산할 지경이 되고 빚쟁이들이 잔뜩 벼르고 있다. 밤잠 설쳐가며 고민한 아버지 스트렙시아데스가 찾아낸 방법은 아들에게 변론술을 배워오게 하는 것이다. 빚쟁이들이 소송을 걸면 재판에서 말로 승소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채무 상환을 피해보려는 이런 식의 꼼수는 그르지 않은가. 상관없다! 소피스트들은 “옳든 그르든” 소송에서 이길 수 있게 해준다지 않나! 그런데 아버지의 속도 모르고 아들은 시큰둥해한다.     


페이딥피데스  대체 누군데요, 그 자들이?

스트렙시아데스  이름은 잘 모르지만 사색가이자 신사들인가 보더라. 

페이딥피데스  쳇, 그 악당들! 알겠어요, 창백한 얼굴에 맨발로 다니는 그 협잡꾼들 말씀이죠? 귀신에 씐 소크라테스와 카이레폰 같은 무리죠.(<구름>, 100-104행)     


느닷없이 등장한 소크라테스. 그렇다. “말로 이기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원 선생이 바로 소크라테스였던 것이다. 아테네의 희극은 현실풍자 성격이 강했는데 이렇게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파네스 외에 다른 작가들의 희극에도 몇 번 등장했으니 꽤나 유명 인사였던 셈이다. 카이레폰은? 이 사람은 소크라테스의 친구이자 열렬한 추종자였다. 소크라테스와 늘 붙어 다녔기 때문에 이렇게 연극에도 함께 등장했다. 


바구니에 담긴 소크라테스. 희극 <구름>의 한 장면. (1564년 또는 이전)


아들은 소크라테스의 무리를 시원찮게 여기는지 학원에 갈 생각이 없다. 별 수 없이 스트렙시아데스는 직접 소크라테스의 학원을 찾아간다. 학원의 분위기는 기괴하기 짝이 없다.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은 “벼룩이 자기 발의 몇 배를 뛸 수 있는지”, “모기가 입으로 앵앵거리는지 똥구멍으로 앵앵거리는지” 따위를 심각하게 연구한다.(<구름>, 144-164행) 소크라테스는 밧줄에 매달린 해먹을 타고 공중을 떠다니며 천체 현상을 탐구하는 괴짜인데, 구름의 여신들을 열렬히 숭배한다. 스트렙시아데스가 가장 놀란 것은 소크라테스가 제우스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스트렙시아데스  아니, 그럴 수가! 그렇다면 올륌포스의 제우스는 신이 아니란 말씀인가요?

소크라테스  어떤 제우스 말인가? 헛소리 말게. 제우스는 존재하지 않아. 

스트렙시아데스  무슨 말씀이죠? 그럼 비는 누가 오게 하죠? 이것부터 설명해 주십시오.

소크라테스  (구름을 가리키며) 이분들이지. 내가 확실히 증명해 보이겠네. 자네는 일찍이 구름 없이 비가 오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자네 말대로라면, 제우스는 이분들께서 출타 중이실 때에도 맑은 하늘에서 비가 오게 할 수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스트렙시아데스  거 참. 잠시 전에 말씀하신 것과 썩 잘 들어맞는군요. 정말이지 나는 전에는 제우스가 체에다 오줌을 누면 비가 오는 줄 알았어요.(<구름>, 366-373행)     


스트렙시아데스는 파격적인 주장과 논리를 펼치는 소크라테스에게 순진하게도 단박에 빠져든다. 하지만 자질이 둔해서 수업을 잘 따라가지 못한다. 결국 그는 싫다는 아들을 억지로 학원에 밀어 넣는다. 아들은 재능이 있었는지 변론술을 곧잘 배운다. 마침내 아들은 학원을 졸업하고 스트렙시아데스는 아들의 도움으로 현란한 궤변을 구사하여 빚쟁이들의 소송을 모두 물리친다. 계획대로 된 것이다! 명문대 나와서 판검사 된 아들을 바라보듯, 아버지는 환호하며 아들의 성공을 기뻐한다.     


아들의 역습     


그런데 이 극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단지 교과 내용을 배우는 것만이 아니라 거기에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가치관도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대학입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영어 단어나 수학 개념을 익히는 일인 동시에 ‘협력보다 경쟁을 앞세우는 태도’를 몸에 새기는 일이기도 하다. 페이딥피데스는 소피스트에게 ‘옳든 그르든 말로 이기는 법’을 배우고 익혔다. 이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옳고 그름은 중요치 않다’라는, 아니, ‘애초에 옳고 그름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 때문에 이 극에서 소크라테스가 제우스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고대인들에게 도덕의 근거는 신이었다. 신이 없다면 옳고 그름의 절대적인 기준 같은 것도 없다. 이제 못할 일이 무엇이겠나! 아들은 아버지와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다가 급기야 아버지를 폭행하기에 이른다.      


스트렙시아데스  어이쿠, 어이쿠, 이웃들과 친척들과 같은 구역민들이여, 얻어맞고 있는 나를 힘을 다해 도와주시오! 아아, 내 머리, 내 턱! 나야말로 불운하구나! 이 못된 녀석, 네가 아비를 쳐?(<구름>, 1321-1325행)     


아프기도 하지만 아버지는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데 더 기막힌 건 아들의 반응이다.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을 부르는데도 아들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당당하다.      


페이딥피데스  제우스에 맹세코, 증명해드리죠, 내가 아버지를 친 것은 정당하다는 것을.

스트렙시아데스  정말 고약한 녀석이로구나. 아비를 치는 것이 정당하다니!

페이딥피데스  내가 증명해주고 아버지를 말로 이겨줄게요.(<구름>, 1333-1334행)    

 

학원에 보내 ‘말로 이기는 법’을 배우게 했더니, 아들은 이제 아버지를 말로 이기겠다고 나선다. “제우스에 맹세코”라는 말이 이제 공허하다. 제우스는 없고, 있는 것은 구름뿐이잖은가.     


페이딥피데스  먼저 묻겠는데, 어릴 적에 저를 때리셨나요?

스트렙시아데스  물론 때렸지. 너를 사랑하고 염려해서 말이야.

페이딥피데스  그럼 말씀해보세요, 제가 염려하여 아버지를 때리는 것도 정당하지 않겠어요? 염려하는 것이 때리는 거라면 말예요. 아버지의 몸은 매를 맞아서는 안 되는데 제 몸은 왜 맞아야 하죠? 나도 자유인으로 태어났어요.(<구름>, 1409-1414행)     


아버지도 자기를 때렸으니 자기도 아버지를 때릴 수 있다는 논리다. 아버지는 ‘내가 때렸던 건 너를 사랑해서였다’라고 항변하지만 아들은 ‘나도 아버지를 사랑하니까 아버지를 때리겠다’라고 받아친다.     


스트렙시아데스  세상 어디에도 아비가 이런 일을 당하란 법은 없을 게다.

페이딥피데스  하지만 처음에 그런 법을 상정해서 그걸 받아들이도록 옛날 사람들을 설득한 것은 아버지나 나 같은 인간이 아니었을까요? 그럼 나는 왜 ‘앞으로는 아버지들에게 매를 되돌려주라’는 새로운 법을 아들들에게 만들어주면 안 되죠?(<구름>, 1420-1424행)     


여기서 ‘법’이라고 옮긴 말은 희랍어로 노모스(nomos)다. 노모스는 좁은 의미의 실정법만이 아니라 도덕, 관습까지 포함해서 넓은 의미의 ‘사회적 규범/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 노모스다. 약자를 도와주라는 것이 노모스다. 남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이 노모스다. 그런데 아들이 이런 도덕의 권위를 비웃는다. 어차피 도덕이라는 거 사람들이 만들어낸 거 아니냐? 그렇다면 이제 내가 새로운 도덕을 만들겠다! 

설상가상으로 아들은 엄마까지 때리겠다고 나선다. 가엾은 스트렙시아데스는 신들에게 기도하며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다. 탄식은 점차 분노로 바뀌고 분노는 소크라테스를 향한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학원으로 달려가 불을 질러버린다. 이 망할 놈들아!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이 깜짝 놀라 달아나면서 소동극은 막을 내린다.    

 

수수께끼의 인물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 석상


소크라테스에 대해 막연히 ‘위대한 성인’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던 독자라면 <구름>을 읽고 어리둥절해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서양 철학사에서 특히 “윤리학의 창시자” 또는 “최초의 위대한 도덕 철학자”라고 평가받는다. 그런데 <구름>에 그려진 소크라테스는 이런 사람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아버지를 때리면 왜 안 되느냐?’고 묻도록 가르치는 인간을 어떻게 ‘위대한 도덕 철학자’라 할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가 극중 인물 소크라테스를 실제와 다르게 엉터리로 묘사한 것일까? 당시 희극작가들은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을 때도 과장이 심하긴 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학원을 차리지도 않았고 돈을 받고 누군가를 가르치지도 않았다. 소송에서 이기기 위한 변론술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이런 점만 봐도 <구름>의 소크라테스가 실제 소크라테스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극에 그려진 캐릭터가 전적으로 허구인 것만은 아니다. <구름> 공연 이후 24년이 지난 기원전 399년, 70세 노인 소크라테스가 기소를 당했는데, 고발장 내용이 이러했다고 한다.     


피토스구에 사는 멜레토스의 아들 멜레토스는 알로페케구 사람 소프로니스코스의 아들 소크라테스를 다음과 같이 기소하고, 선서한 다음 진술하는 바이다. 소크라테스는 폴리스가 믿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령스러운 것들을 끌어들임으로써 불의를 행하고 있으며그는 또한 젊은이들을 망침으로써 불의를 행하고 있다. 구형은 사형.(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전양범 옮김, <그리스철학자열전>, 동서문화사, 2008, 108쪽)

     

이거야말로 <구름>의 학원 선생을 연상시키는 죄목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얼마만큼 과장했는지는 모르지만 <구름>의 소크라테스는 실제 그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를 때리면 왜 안 되느냐’고 묻는 페이딥피데스와 ‘위대한 도덕 철학자’ 소크라테스, 둘 중 어느 쪽이 진짜 소크라테스일까? 

이렇게 생각해보자. 소크라테스의 두 가지 면모가 실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말이다. 말하자면 페이딥피데스의 모습에서 ‘위대한 도덕 철학자’의 면모가 보이지 않나? 탄식과 분노를 가라앉히고 그의 말을 냉정하게 복기해보면, 중요한 대목은 ‘앞으로 나는 아버지를 때리겠다’(결론)가 아니라 ‘아버지는 아들을 때려도 되고 아들은 아버지를 때리면 안 된다는 노모스가 타당한가?’(문제제기)이다. 페이딥피데스가 검토한 노모스의 기원과 타당성은 이렇다.     


① 사회에는 도덕이나 관습 등의 규범, 곧 노모스가 있다.

② 이런 규범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③ 따라서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④ 따라서 규범을 바꿀 수도 있고 새로 만들 수도 있다.     


페이딥피데스는 사회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가치와 규범에 대해 ‘그것이 정당한가?’라고 따져 물었다. 이 불온한 물음이 윤리학의 출발점이다. 윤리학/도덕철학이란 단지 훌륭한 행위들의 목록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행위의 근거를 탐구하는 것이다. 어떤 것의 근거를 캐묻는 일은 그것의 당연함을 의심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런 점에서 <구름>의 페이딥피데스는 실제 소크라테스와 겹쳐지는 면이 있다. 소크라테스도 사람들이 자명하게 여기는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졌다.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언제나 불온하게 여겨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구름>에서 ‘수상한 선생’으로 그려진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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