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난다 May 25. 2021

바다를 '나는' 여인들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름다움'의 정체!


예감은 적중했다. 그녀들 역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바다생명체들과 그녀들이 내뿜는 아름다움의 본질은 지금 여기 주어진 삶에 집중하는 힘이었다. 해녀박물관에서 만난 그녀들은 정확히 바다에서 만난 생명체들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된 존재다.
각자가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던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
더 선하려고, 더 옳으려고, 더 나으려고 애쓸 이유가 하나도 없다.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 이미 생명의 네트워크에 충분히 기여하고 있다.

소라게와 작은 물고기와 따개비들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 여인들에게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얘기? 그렇다면 정말로 다시 살아볼 만 하겠구나!


그 여인들도 사람이니 때로는 나처럼 갖지 못한 것에 애 닳아 잠 못 이루는 밤이 있었을 것이다. 할 수 없는 일들이 서러워 무너져 내린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의지해 삶을 이어가는 존재들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들어갔던 바다에서 아무런 대가도 없이 제 생명을 내어주는 생명체들이 말이 아닌 언어로 전하는 존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에 그 밤을 넘기고 다시 일어나고, 그 날을 보내고도 다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바다와 함께 셀 수 없이 많은 날들을 보내며 끊임없이 주고 받고 먹고 먹히는 생명의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더 없는 기회이자 축복임을 몸으로 서서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분명히 알게 되었다. 서울을 떠나오기 전 나를 덮친 번뇌의 실체를. 나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 역시 이미 우주가 만들어놓은 생명 네트워크의 당당한 일원이라는 것을. 그 축복의 네트워크 안에서 내게 주어진 일을 해내기 위한 모든 힘과 기술 역시 이미 내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그리고 너무나 당연히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해내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우주의 일이기에 그 누구도, 설사 나 자신조차도 그 일의 시비와 선악과 우열을 판단하고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늘 옳고 싶고, 선하고 싶고, 이기고 싶은 작은 마음이었다. 받기만 하고 주고 싶지 않은, 먹기만 하고 먹히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그것은 지구 위 모든 생명체들의 에너지인 태양을 독점하고 싶어 하는 것과 같았다. 아니 어쩌면 내게 ‘사는 것처럼 산다는 것’의 이미지는 스스로 태양 그 자체가 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비현실적인 이미지에 빗대어 현실의 나를 쉴 새 없이 판단하고 평가하고 단죄하느라 정작 삶 자체에 집중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던 거다.


부족한 존재임을 들키고 나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뿌리 깊은 두려움도, 부족함을 메워보려는 노력으로 그 두려움을 극복해보겠다는 헛된 희망도, 이렇게 불안한 채로 남은 삶을 어찌 감당해내나 하는 걱정도 모두 그 작은 마음이 만들어낸 무지와 오만에서 비롯된 고통이었던 거다.


내게 주어진 생명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지금 여기에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이미 충분하다니. 묵직하던 가슴께가 후련해졌다. 호흡이 거듭될수록 몸도 점점 가벼워졌다. 세포 하나하나에서 충만한 힘이 느껴졌다. 제주에 오기 전, 마치 물에 젖은 솜처럼 한없이 가라앉기만 하던 때로서는 감히 꿈조차 꿀 수 없던 변화였다.




세화해변 바위틈에서 만난 소라게에게


안녕, 소라게야. 잘 지내고 있니? 모래 위 파도가 내어놓은 물길에서 춤추듯 헤엄치고 있던 모래빛깔 작은 물고기들과 용암이 바다와 만나면서 만들어진 바위의 공기구멍마다 마치 꼭 맞는 뚜껑처럼 앉아있던 따개비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구나.


맞아. 나야. 지난 7월 세찬 소나기가 지나간 직후의 어느 오후, 그 바닷가 바위틈에서 별처럼 반짝이며 움직이고 있던 너의 모습에 넋을 잃어버렸던 암컷 인간. 예상했겠지만 나는 잘 살고 있어. 다 너희들 덕분이지.



그날 거기서 너희를 만난 이후 참 많은 것이 달라졌어. 조금 과장을 하자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 순간 너희와 나 사이에 흐르던 그 깊고 단단한 연결감을 잊을 수가 없어.


너희는 내게 대체 뭘 한 거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 그날 이후 두 달이 다 되도록 스스로 답을 찾아보려고 애썼지만 아직 납득할 만한 답을 얻지 못했어. 어렴풋이 알 것 같기는 한데 도무지 합리적으로 설명해 낼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다 알아차리게 되었지. 내가 여전히 ‘논리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라는 낡은 신념을 벗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정신이 번쩍 났어. 이대로라면 조만간 나조차도 그날 우리 사이에 있었던 그 선명한 진실을 의심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싶었거든.


오늘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쓰기로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야. 난 이제 다시는 너희를 만나기 전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거든. 그래서 말이 되던 안 되던 ‘너희는 내게 대체 뭘 한 거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라는 질문에 그동안 내가 찾은 답들을 정리해보려고 해.


우선 너희는 너무나 아름다웠어. 그래서 충격이었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거기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작은 너희들의 몸짓이 어떻게 그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때 깨달았지.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름다움’이란 군더더기 없이 자기로 살아 있는 존재들이 내뿜는 에너지였다는 걸.


그 앎은 머리를 거치지 않은 유기체간의 에너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왔던 것 같아. 그렇다면 그저 눈만 맞출 수 있어도 저절로 찾아오는 그 당연한 앎을 왜 그제서야 맞이하게 된 거냐고? ‘크고 위대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해야한다고 믿었던 중요한 일들을 해치우느라 바빠 너희를 자세히 들여다 볼 여유가 없었기 때문 아닐까?


너희들이 온 존재로 표현하고 있는 그 아름다움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다시 한번 깜짝 놀랐어. 모든 것이 실제 상황이었잖아? 너희들을 비롯한 무수한 생명체들이 어떤 안전망도 없는 야생의 현장에서 자신의 생명을 건사해내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가 않았어. 도대체 그 작은 몸 어디에서 그런 용기와 힘이 흘러나오는 걸까?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어. 아니, 솔직히 고백할께. 내게 가장 절실한 그 것을 가진 너희가 너무나 부러웠어.


그 때였어. 너희들을 바라보고 있던 시야가 이상해지기 시작했어. 너희들을 바라보고 있는 내가 눈에 들어오는 거야. 그리고도 계속해서 줌아웃, 줌아웃. 내 모습은 점점 작아져 갔어. 그렇게 내 자신이 꼭 너만한 크기로 보이던 즈음 나를 경이와 감탄으로 바라보는 어떤 시선을 느낄 수 있었지. 그게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어. 나 자신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를 넘어 선 신적인 존재였던 것 같기도 해.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존재와 나 사이에 흐르는 연결감이었어.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그 시선에서 나는 그가 보내는 무한한 응원과 격려를 느낄 수가 있었어.


그제서야 작아진 껍질집을 빠져나와 새껍질집을 찾고 있는 지금, 나를 압도해오는 이 엄청난 두려움마저도 반드시 거쳐야할 내 길의 일부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 그리고 찾아온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편안함이었지. 밑빠진 독처럼 에너지가 새나가던 영혼의 항아리가 다시 차오르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였던 것 같아.


두려운데 두렵지 않은 그 오묘한 느낌을 꼭 들어맞게 전달할 수 없다는 게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야. 하지만 소라게 너는 내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겠지? 지금쯤은 자라난 영혼에 꼭맞는 새껍질집을 찾았느냐는 네 질문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아직 새로 만나게 될 껍질집이 어떤 모습일지는 잘 그려지지 않아. 어렴풋이 그 때 너희와의 만남을 통해 체감했던 생명의 네트워크 안에 더 깊게 자리 잡을 수 있는 형태가 되리라는 것 정도를 짐작하고 있을 뿐이야. 어쩌면 이번에는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있기도 하고. 만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가 새로운 삶의 핵심이 될 거라는 조금은 더 분명한 느낌 속에 있기도 하지.


소라게야. 너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이 우주의 어디쯤을 지나고 있니? 네가 있는 바로 그곳으로 고마움과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를 띄워 보낸다. 지금 네가 있는 그 곳에서 너와 함께 춤추고 있을 아름다운 친구들에게도 안부 전해주길 바래. 사랑한다는 얘기인 거 알지? ^^








이전 07화 다르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솔직해지는 것 뿐이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