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고양이 마을로 알려진 김녕미로공원이었다. 딸아이의 선택이었다. 아이의 선택 포인트는 오로지 ‘고양이’. 아이 입장에선 고양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을 터였다. 문제는 엄마인 나였다. 하필이면 ‘미로공원’이라니.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방향감각이 떨어져선지, 공간지각능력의 문제인지 길을 기억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초행길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가끔은 몇 차례나 오가던 길도 갑자기 가물가물해지며 머리가 하얗게 되곤 했다. 최단거리, 최고효율의 루트를 능숙하게 찾아내 폼 나게 안내하고 싶은 욕심과는 달리 길 위에만 서면 유독 더 느리고 한심하게 허둥대는 내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 도무지 편해지지가 않았다.
이런 나였으니 ‘미로’라는 말에 저항이 확 올라왔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가 ‘가슴의 소리’에 따라 처음 스스로 선택한 여행지가 아닌가? 게다가 미로라고 해봐야 ‘공원’, 그러니까 가상현실일 뿐인데 예민하게 굴 일이 뭐가 있는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다보니 한편으로는 묘한 기대감도 차올랐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도착했던 제주에서 지난 사흘 펼쳐진 시간들이 마치 나를 위해 정교하게 디자인된 치유프로그램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혹시 알아? 여전히 막막하기만 한 삶의 미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라도 건네받게 될지. 버스 창문에 비친 표정이 조금은 편안해진 듯 했다.
헤매면 헤맬수록 건강해지는 향나무 미로! 충분히 헤매고 건강해지세요!
공원 입구에서 건네받은 안내문의 첫 장에서 이 문구를 발견하고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헤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음 장을 넘기니 미로를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 소개되어 있었다.
‘일행과 10초쯤 간격을 두고 출발하세요. 지도를 보지 말고 끌리는 대로 길을 가다 먼저 종을 치는 사람이 이기는 내기를 즐겨 보세요!’
물론 여기까지 와서 이기고 싶은 마음 따위는 1도 없었다. 빨리 탈출해봐야 다시 또 들어오는 것 말고는 다른 할 일이 없는 공간에서 굳이 승부에 집착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아니 아예 ‘미로’라는 것마저 잊고 정말 향나무 숲 산책한다 생각하기로 했다. 어깨가 스칠 때마다 조금 더 진하게 풍겨오는 나무향기를 의식하며, 뒷꿈치부터 발바닥이 땅에 닫는 느낌의 변화에 집중하며 명상하듯 느리고 고요한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딸아이는 이미 미로의 첫 갈림길에 누워있는 고양이를 하염없이 바라보느라 여기가 미로임을 정말로 잊은 것처럼 보였다. 아이에게는 사랑스런 고양이를 가까이서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듯했다. 그렇지, 여기서 정말 이기는 사람들은 더 빨리 출구를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으로 미로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일지도 몰라. 어쩌면 내가 그토록 버거워하는 삶이라는 미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1997년 미로공원이 개장한 지 20년이 넘어가도록 그 어느 누구도 미로에 영원히 갇힌 사람이 없는 것처럼 우리 역시 아무리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영원히 삶 안에 갇히는 일을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미로공원에서든, 삶에서든 우리들의 모든 선택은 결국 같은 결과(미로에서는 탈출, 삶에서는 죽음)로 귀결된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더 유리한 선택을 저울질하느라 흘려보낸 무수한 시간과 에너지는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한 치의 낭비도 없는 최고 효율로 빨리 미로를 탈출하는 것?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을 가늠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더 '효율'적으로 죽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희생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다. 어떤 길이든 더 끌리는 쪽으로 가 그 길을 흠뻑 경험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은가? 이제는 더 이상 길 위에서 쫄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곳이 아닌 ‘미로’에서 이런 평화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삶의 미로에서도 이럴 수만 있다면 삶이 한결, 아니 완전히 달라질 수 있겠구나! 이거였구나! 나를 너무도 사랑하시는 그 누군가는 바로 이것을 깨우쳐주기 위해 미로공원으로 나를 데려온 것이구나! 이 엄청난 것을 미로 공원에 들어온 지 10분도 안 되어 깨달아버리다니! 나란 존재는 역시!
바로 그때였다. 땡땡땡땡~! 미로에 들어서서 첫 번째 종이 울렸다. 누군가 출구를 찾았다는 신호였다. 머리로 이해한 깨달음과는 전혀 다른 몸의 반응이 시작된 것도 그 때부터였다.
“딸, 여기서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응”
“그럼, 엄마는 먼저 근처만 좀 돌아보고 올게.”
“어”
아이의 집중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이가 충분히 자신의 시간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지금 이 순간 엄마인 내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아이가 움직이고 싶어질 때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길안내를 할 수 있으려면 근방이라도 미리 살펴두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발걸음을 떼려고 하니 아무리 공원 안이라지만 아이를 혼자 두어도 되나 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어쩌지?
그때였다.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요 앞까지인데 뭐. 그렇게 조금 더 미로 속으로 들어가자 눈앞에 표지판이 보였다.
미로공원에서 5분 안에 종을 울릴 확률 5% 10분 안에 종을 울릴 확률 10% 30분 안에 종을 울릴 확률 80% 1시간 안에 종을 울릴 확률 95% 1시간이 넘도록 헤맬 확률 5%
김녕미로공원內 표지판 中
나도 모르게 시계를 꺼내들었다. 미로로 들어온 지 15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아직 입구에서 몇 미터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벌써 15분이 지났으니 상위 10%는 이미 물 건너 갔네. 30분 안에라도 종을 울릴 수 있으려면 서둘러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아이를 데리러 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야 그렇다 쳐도 아이에게 벌써부터 루저의 삶을 경험하게 해서는 안 되지. 애써 다스려놓았던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서둘러 아이에게로 돌아갔다.
“딸,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이제 그만 가자!”
“엄마, 고양이가 처음에는 다른 데만 쳐다보더니 방금 전에 나 보고 웃었다! 완전 이뻐. 이름은 '삼색이'. 이거 봐. 아까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왔지? 이제 겨우 친해졌는데 벌써 헤어져야해?”
“고양이는 다른 데도 많은데 하필 미로 입구에서 이러고 있니? 다른 사람들은 미로탈출에 성공해서 자꾸만 종을 쳐대는데 계속 미로에 갇혀 있을 거야?”
“알겠어. 가면 되잖아.”
일어나 걸으면서도 한참을 고양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빠른 걸음으로 미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차례 갈림길에서 아이와 의견이 갈렸지만 가뜩이나 늦었는데 아이의 의견까지 일일이 들어줄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어서 빨리 미로에서 탈출해서 보란 듯이 종을 치는 쾌감을 체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게 왠일인가? 이제는 다 왔으려나 싶었는데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아까 그 고양이였다. 다시 제자리란 이야기였다.
“와~!! 삼색이다!”
아이는 반가워 어쩔 줄 모르면서도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그 순간 내 마음 속에는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내가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아니지, 다 아이를 위해서가 아닌가? 하지만 과연 내가 아이를 위한 최선의 길을 찾아낼 수 있기는 한 걸까? 아이가 이런 한심한 엄마를 닮기라도 하면 어쩌지? 나는 이제 어떻게 하면 좋지? 온 몸의 피가 말라붙어 가는 느낌과 함께 혓바닥에서 쓴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코로 들어오는 공기에서 향나무 내음이 가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곳은 이제 더 이상 평화로운 향나무 산책길이 아니었다.
그 순간 정신 번쩍 들었다. 도대체 왜 또 이렇게 된 거지? 그까짓 종소리가 뭐라고? 정신 차리자! 하지만 온 몸에서 이미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지옥의 감각을 잠재우기에 머리의 다짐에서 비롯된 의지는 너무나 허약했다.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금 진정이 된 것 같다가도 종소리가 울려대면 어김없이 몸이 반응했다. ‘다르게’ 살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기꺼이 받아들였던 뿌리깊은 조건반사를 순식간에 해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서야 신이 나를 이곳으로 안내한 이유가 새롭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정말로 ‘다르게’ 살고 싶다면 몸에 각인된 조건화의 패턴을 씻어내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정성을 다해야겠구나. 더 높은 깨달음에 이르러 세상을 단박에 구원하겠다는 허망한 희망을 이제 그만 접고, 지금 여기 내 몸의 현실에서 스스로를 치유해가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겠구나.
“엄마!”
고개를 들어보니 다시 만난 고양이와 헤어지지 않겠다며 미로 입구에 주저앉아 버렸던 딸아이가 종탑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 여기서 고양이랑 놀고 있을 테니까 엄마도 천천히 놀다 와!”
그날 미로공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이에게 물었다.
“딸, 어떻게 그렇게 빨리 종을 찾았어?”
“엄마가 먼저 가고 나서 조금 있다가 삼색이가 일어나 걸어 가길래 나도 따라 갔거든. 그러니까 바로 종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나오더라고. 삼색이랑 위에 있는 벤치에 앉아서 정말 재미있게 놀았어. 엄마가 빨리 올라와서 가자고 할까봐 조마조마했는데 늦게 와줘서 고마워.”
행복해하는 아이의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온 몸이 목화솜처럼 폭신하고 보송보송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새로운 연결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