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의 초입에서
"호성아 생일 축하한다! 이제 마흔을 목전에 두고 마지막 30대 생일이네 ㅎㅎ 우린 너의 본고장인 디씨에 와 있어 많이 걷고 많이 보고 있는데 디씨 무척 좋네! 행복한 하루 보내렴 -정운-
내 생일 그리고 미국 근로일에 맞춰서 일하는 아내의 추수감사절 연휴에 휴가를 내고 그 유명한 인도네시아 발리섬으로 휴가를 떠났다. 아직 돌이 되지 않은 어린아이와 여행하는 게 생각만큼 쉬운 건 아니지만, 새로운 곳에서 가족들과 맞이하는 생일은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발리를 다녀온 지인들로부터 좋은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었기에 딸과 떠나는 첫 가족 해외 여행지에 대한 기대감은 컸다.
아이가 생긴 후 오랜만에 휴식과 재충전을 할 여행이 될 것을 상상했지만, 역시나 어느 여행에나 복병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당초 미국 연휴 기간이면 아내가 푹 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여행을 계획했다. 아내와 같은 국제기구에서 일하지만 민간 기업들의 개발도상국 투자보증 업무를 하는 아내 부서에서는 투자의 주체인 민간자본의 특성상 심심치 않게 급히 일을 추진할 것을 종용한다. 하필 이번 여행에 고객이 걸려, 출국 전 아내의 마음도 무겁고, 이런 일이 있을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내가 산 비행기 표는 변경 및 취소가 불가했기에 이도저도 못하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어차피 날리는 비행기표 값인데 좋은 곳에서라도 보내면서 있어보자는 심정으로 출국 전날 아침 겨우 짐을 챙겨서 발리로 날아갔다.
업무상 개발도상국을 다닐 일이 많은데, 발리섬의 공항은 규모가 크진 않았지만, 짜임새 있었고 매우 실용적이며 입국 과정은 뉴욕 JFK와 비교해도 훨씬 간소했다. 비슷한 규모의 도시나 나라의 공항과 비교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은 여전히 조금 무거웠지만, 다행히도 발리 도착 후 기분 좋게 숙소로 향했다.
두 번째 복병은 숙소의 객실 문제였다. 싱가포르에는 한국에서도 도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개발도상국 출신 가사도우미 제도가 1970년대부터 시작되어 거의 모든 가정에 가사도우미(헬퍼)가 상주하면서 가족들의 필요한 가사를 도와주고 있다. 우리도 맞벌이에 아직 아이를 보육원에 보내기엔 어른 것 같아 헬퍼와 같이 살고 있는데, 이번 여행에 헬퍼도 같이 동행했기에 예년 여행과는 달리 더 넓은 공간의 방이 필요했다.
이번 여행의 숙소들은 우리가 좋아하는 하얏트 호텔 체인으로 그동안 쌓았던 포인트로 기본방을 예약을 했는데, 예약 당시인 약 한 달 전에는 객실과 화장실이 추가로 있는 스위트 여유가 많아 보여서, 미리 돈을 내고 업그레이드하지 않고 당일날 가서 상황을 보고 업그레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호텔에 도착해 보니 스위트 객실 여분이 없어서 포인트로 예약한 기본 방에서 돈을 더 내도 객실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아차 내심 나의 하얏트 멤버십 등급을 토대로 무료 업그레이드를 기대했던 나의 패착이었다. 이로 인해 공항 도착 및 호텔 도착까지 시간만큼 우리 가족에 적합한 객실을 찾아 들어가는데 까지 시간이 엇비슷하게 들었다. 그동안 아내는 발리의 더위와 시름하며 야외에 있는 리조트 라운지에서 일에 다시 몰입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이 좀 있었지만 다행히 호텔 직원의 도움으로 우리가 원하는 방에서 투숙을 할 수 있었다. (무료는 아니었지만, 그 정도 금액을 지불하기에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이미 출국 전부터 끝나지 않은 일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을 아내가 최대한 빨리 시원한 객실에서 일을 볼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데, 매우 미안한 마음에 아내가 숙소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저녁 장소와 저녁 후 아내와 같이 마사지받을 곳을 찾아가서 예약을 하고 객실로 돌아왔다. 아내는 야외 라운지에서 일하면서 모기들에 뜯긴 다리의 간지러움을 참으면서 일을 계속하고 있었고, 우리 헬퍼는 그새 아 육아에 필요한 모든 아이템들을 정리해 두었다.
자녀가 생겨보니 양가 부모님이 나와 아내를 키우기 위해 정말 엄청난 헌신과 사랑을 주셨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싱가포르가 중산층 이상의 외국인이 살기에 매우 좋은 곳이라고 하는 데는 이는 헬퍼제도와 같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희생하는 자들이 우리 집 외에도 사회 곳곳에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마흔이 언저리에서나 이런 것들을 깨닫는다는 부모가 되지 않았으면 이런 생각을 했을까도 싶다. 그런 면에서 우리 딸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 가정과 가족들에게 복덩이다. 더 감사할 수 있고, 모든 일에는 누군가의 잘 보이지 않는 희생이 있다는 걸 항상 생각하게 되어 감사하다.
다시 발리의 상황으로 돌아가면, 생일을 3일 앞두고는 내가 이제 한국 나이로 마흔이 곧 된다는 생각은 전혀 못하고, 오로지 아내가 휴가지에서 일과 쉼을 어떻게 잘 대등하게 즐기다 갈 수 있을지, 집을 떠나서 낯선 환경에서 아이가 탈 없이 잘 지내가 싱가포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집중되었다.
다음날 오전은 아내가 일을 할 동안 리조트에서 자전거를 빌려 발리 Sanur 지역 해안선을 따라서 자전거로 한 시간 정도 돌아다녔다. 발리가 자연과 개별 호텔/리조트들에 비해 공공재인 인프라가 매우 부실하다는 이야기를 드고 왔는데, Sanur 지역 해안선 보행 및 자전거 도로는 상당히 잘 갖추어져 있어 영어로 표현하자면 기분 좋게 놀랐다 (pleasantly surprised).
어릴 때부터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젠 살짝 직업병인지 아니면 관심사가 더 이렇게 발달된 것인지 어딜 가든 교통 인프라에 시선이 많이 가게 된다. 사람들이 안전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공간이 그 도시에서의 경험뿐만 아니라 경제 그리고 조금 비약적으로 나가자면 사회의 균등한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나에게 이제 마흔이 문턱에서 숙제와 같이 남아 있는 주제이다.
세계 어디를 가든지 걷고, 뛰고, 자전거를 타면서 그곳의 자연과 문화를 경험하는 것이 사람 건강도 해치고, 위험할 수 있는 화석연료를 소비하는 전동화된 개인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아직도 내 마음속의 희망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일이야 말로 각국 정부와 같이 긴밀히 일하는 우리 회사에서 잘할 수 있는 일인데, 10년을 다녔지만 아직도 내가 배우고 할 일이 많다는 생각만 더 든다.
다시 숙소로 돌아와 가족들과 수영을 하러 바닥가옆 수영장으로 향했다. 물론 수영이라기 보단 딸과 물속에서는 노는 두 부모의 물놀이였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어느 순간부터 주변 지인들의 SNS에는 본인들 자녀의 사진들로 도배가 되기 시작했는데, 나도 자녀가 생기니 왜 "딸바보", "부모", "아빠"가 되는지 격하게 공감하게 된다.
어디 업로드하진 않았지만, 싱가포르에 돌아와서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혼자 또는 아내와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아직 낯설면서도 점점 익숙해지는 것 같다. 부모님도 마흔 아니 더 이른 나이에 나 같은 감정을 느끼셨을까?
둘째 날 오후에는 아내 절친의 발리 최애 장소 두 곳을 다녀오기로 했다. 발리섬 전체는 제주도 보다도 크지만, 보통 관광객이 다니는 곳은 싱가포르에서 같은 거리를 가는 것과 비교해서 항상 2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추천받은 곳은 세미냑이라는 곳에 있었는데, 너무 기대를 하고 가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생각만큼 엄청 좋다는 느낌을 받진 못했다.
그래서 왜 그럴까 생각해 봤는데, 나이라는 부분이 상당히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만약 내가 20대 혹은 조금 더 활동적이었던 30대 초반에 왔다면 아내의 절친처럼 세미냑이라는 곳을 더욱 만끽하고 즐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린 호텔방에 헬퍼와 아이를 두고 나온 부모라서 그런지 추천 장소들을 구경하고 저녁을 먹고 바로 숙소로 다시 돌아갔다. 갈 때도 차가 많이 막혔지만, 저녁 이후에도 도로상황이 좋지 않아 시간이 오래 걸렸다.
셋째 날 아내와 내가 매우 기대하던 하룻밤에 미화 천불 가까이 되는 숙소로 향했다 (물론 포인트로 예약을 해서 호텔비용은 무료였다). 이때는 아내도 일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라 나의 몸과 마음도 가벼워졌고 다시 숙소에 대한 기대감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호텔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으나, 생긴 지 15년 가까이 되어서 그런지 방의 화장실에서는 악취가 나고, 방안 가구들은 여기저기 낡은 느낌이 많이 났다. 그래도 마지막 1박을 최대한 즐겨야겠다는 생각에 영장에서 수영도 하고 호텔이 가장 내세우는 석양은 마음껏 즐겼다.
그리고 잠시 다음날이 내 생일인 것도 잊고 있던 내게 저녁 식사 후 생일 케이크가 등장했다 (아내가 나 몰래 주문했다) 전혀 생각을 못했지만, 38번째 생일 케이크를 불고 난 이후 호텔 방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이 다 잠들고 난 후 혼자 유별나게 객실에서 나와 발리 밤하늘을 보면서 생각했다. 만으로는 서른여덜이지만, 한국 나이로는 이제 마흔이구나... 기분이 묘했다, 그런데 너무 졸려서 다시 침대로 향했다.
원래 한국나이로 나이를 세지 않는데, 이제 곧 마흔이 된다는 생각이 급 들기 시작했다. 아마 생일 당일날 오전에 받은 정운이의 문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30대 내내 생일을 지날 때마다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이번 생일은 뭔가 인생의 경각심을 가지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생일이었다. 이게 나 그리고 아내뿐만 아니라 이제는 자녀가 있는 아빠이기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만으로 나이를 세기 때문에 아직 온전히 내가 마흔이 된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천천히 마흔이 되어가면서 드는 생각들을 적어보고자 한다.
(아직 정리 중이라 글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보여도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