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유료, 얼음은 무료인 나라

같은 것인데 유료이기도 하고, 무료이기도 한 나라

by 성이호성
'물 값까지 꼬박꼬박 챙기는 건 좀 야박한 게 아닌가'

싱가포르에 처음 와서 신기하다 싶었던 게, 상당히 많은 식당들에서 물 값을 따로 받는 점이었다. 물 인심이 좋은 한국과 미국 두 곳에서 산 사람에게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마다 물 값을 따로 내야 하는 게 처음에는 조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식당은 자선단체가 아니라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라는 게, 머리로는 이해가 되어도 마음속으로는 '물 값까지 꼬박꼬박 챙기는 건 좀 야박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싱가포르 생활 초기에 자주 들었다.


미국 스타벅스에서 얼음물 한잔 주문하면 컵값도 안 받고 무료로 주는데... 물론 플라스틱 컵과 빨대를 과하게 사용하게 되어 환경에는 안 좋겠지만, 물을 기반으로 장사하는 곳조차 물인심이 넉넉한 나라에 있다, 이 나라의 식당들에서 수돗물도 돈을 따로 받는 것에 놀랄 수 있다.


한국은 푸드코트를 가더라도 항상 어딘가 정수기와 컵이 있어서 물을 따로 사 마셔야 할 일이 별로 없는데, 싱가포르의 *호커센터에 가면, 물뿐 아니라 휴지도 안주는 경우가 다반사라 이 나라에서 몇 달 지내다 보면 물 값 내는 것에 대한 불편한 감정은 생각보다 금방 사라진다.

* 호커센터: 싱가포르를 배경으로 촬영한 Crazy Rich Asians에서 주인공들이 밥을 먹던 곳. 과거 길거리 노점상의 위생과 관리를 위해 지붕이 있는 건물로 식당들을 모아 만든 이 동네의 푸드코트.
싱가포르의 관문 창이공항 쥬얼 어느 식당에서 짠 (이곳은 물 값을 받았는지 잘 기억이 나진 않는다)
물은 이 나라 건국 이전부터 부족했다

물론 여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다. 1819년 영국의 Stamford Raffles 경이 싱가포르를 영국 동인도회사의 거점 무역항으로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곳은 물이 부족한 국가였다. 이 나라의 가장 높은 곳이 164 m 밖에 되지 않고, 간척 사업 이전에는 서울보다도 좁은 면적의 태생적으로 물을 확보하기 어려운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었다.


1965년 싱가포르는 자국의 의지와 무관하게 말레이 연방으로부터 강제 독립을 경험하게 되는데, 건국 초기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물 확보야말로 국가 존립을 위협할 가장 큰 문제 아니었을까? 자연적인 조건만 놓고 보면 이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물이 부족한 국가 중 하나이다. 어느 UN 보고서인지 모르겠지만, 이곳 정부 관계자들 인터뷰를 보면 사막 기후 국가들과 함께 싱가포르가 뒤에서 5등 안에 들었다고 하니 더 말할 필요가 없을 듯한다.


건국 이전 3개의 인공 저수지가 만들어졌고, 이웃 말레이시아 조호바루에서 물을 공급받고 있었지만, 이는 급격히 성장하는 도시의 물 수요를 온전히 충족하기에는 부족했다. 1965년 이전에는 여러 차례 물 배급을 실시해야만 했는데, 이 나라의 지도자와 정부의 선제적인 개입으로 독립된 나라가 된 이후로는 아직까지 물 배급을 한 적은 없다고 한다. 다만 물 배급 훈련은 가정에서 그리고 교육은 지금까지도 초중고를 통해 진행되고 있는 듯하다.


물 부족이 물의 가치를 높인 게 아닐까?

싱가포르가 약 200년간 생존을 위해 실시했던 여러 물 확보 노력들을 고려하면 물에 대한 가치가 남다를 듯하다. 지금은 이 나라에 말레이시아로부터 공급받는 물 이외에도 5개의 해수담수화 공장 (바닷물을 수돗물로), NEWater (폐수를 재활용 수돗물로), 17개의 지상 빗물 저수지를 통해 물 안보를 지키고 있지만, 독립 초기에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이웃 나라 말레이시아로부터 물 공급을 철저히 의존해야 했던 경험은 물에 더 높은 가치를 책정하게 된 이유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식당에서 무료로 물을 주는 게 오히려 이상한 걸까?


싱가포르 현지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보니, 그냥 식당들 임대료가 비싸서 뭐 하나라도 돈을 더 받으려고 해서 그런 것 같다는 말도 공감하지만, 이곳 사람들 무의식 속에 과거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절의 기억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지금은 역으로 말레이시아가가 싱가포르와 맺은 장기 물 공급 계약이 싱가포르에게 너무 유리해서 이를 개정하자고 말레이시아가 계속 요구하고 있지만, 싱가포르 정부 입장에서는 이에 응할 필요가 없는 유리한 상황이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그런 상황이랄까.


현지에서 커지는 식당의 수돗물 무료 제공 필요성
이 포스트를 작성하기 위해 싱가포르에 식당의 물 제공 관련 의무 규정 같은 것은 없을까 검색하다 어느 NUS (싱가포르국립대) 법대 교수가 신문 칼럼에 '싱가포르의 환경을 고려한다면 식당들에서 수돗물을 무료로 제공해야 한다'는 글을 기고한 게 흥미로워 링크를 공유해 본다. 이 나라에서 수돗물을 무료 제공해 주는 식당들도 있지만, 수돗물도 유료인 경우가 아직은 더 많게 느껴지는데, 이런 칼럼들이 이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https://www.straitstimes.com/opinion/forum/forum-time-to-end-no-free-water-policy-of-restaurants


물 확보와 관리는 홍수 피해를 줄이는데도 도움이


싱가포르는 수많은 간척사업으로 1800년대 영국의 무역거점으로 시작했을 초기와 비교해서 약 25% 정도 국토의 면적이 늘어났다. 이는 현재 서울시 보다 약 20% 큰 면적인데 (싱 735 km2, 설 605 km2) 나라의 약 2/3 정도가 물을 저수지로 집수 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토지이용 계획을 세워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향후 국토의 90%을 집수가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게 이 나라의 장기 계획이다.


한국의 기후가 온난화되면서 국지성 집중 호우로 매 여름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주요 도시들이 번갈아가면서 피해를 겪고 있는데, 이 나라에서는 국지성 호우가 연중 수시로 내리지만, 아직까지 어디 홍수가 났다는 이야기를 접해보지 못했다. 이건 물 관리가 국토(도시) 계획의 중요한 축이라서 가능한 게 아닐까?


다리 하나면 건너면 있는 이웃 말레이시아 조하바루만 하더라도 지난 몇 년간 큰 홍수 피해가 여러 번 났다고 하는 걸 보면, 홍수는 자연재해라고 하지만, 도시에서의 홍수는 사람들이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따라서 인재로 구분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은 경제 성장의 밑거름


1965년 이 나라의 1인당 명목상 GDP는 미화로 약 500불 같은 시기 한국은 약 100불 미국은 약 3,800불이었다. 한국 경제성장을 논할 때 1970년 개통한 경부고속도로를 고속성장의 시발점으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수도권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경부고속도로보다 1년 먼저 착공해서 73년 완공된 소양강댐을 필두로 국가의 계획적인 물 확보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흔히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물을 확보하여 인구 및 경제성장의 기여한 공로를 따지자면 소양강댐을 비롯한 한강 유역의 여러 댐들이 경부고속도로보다 더 크게 기여한 건 아닐까?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기여를 했겠지만, 나는 경부고속도로만큼 조명받지 못하는 한강 유역의 여러 댐들에 한 표를 던져보고 싶다.


싱가포르도 독립 후 물 확보 및 관리의 도사가 되어, 지금은 전 세계 물 전문가들의 대표적 성공사례 칭송의 대상인듯하다.


장바구니 필수품 아이스팩과 얼음!


이 나라에서는 식료품 장을 보고 집에 귀가할 때 아이스팩은 필수품이다. 비가 집중적으로 계속 내리는 우기가 아닌 이상 연중무휴 더워서 에어컨이 없으면 살 수 정도로 항상 덥다. 한결같은 고온다습의 더위에 적응하는 건 식당에서 물 값을 지불하는 것만큼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이 나라에서 오래 사신 분들의 말에 의하면 6-7년은 지나야 이곳 더위에 몸이 조금 적응한다고 하는데 내가 이 나라의 기후에 적응할 날이 올까 싶다.


날이 항상 덥다 보니, 입싱 (싱가포르 입성 줄임말) 초기 동네 마트로 장을 보러 갈 때 집에서 아이스팩에 얼음팩 챙겨 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 마트의 구석마다 얼음은 무료로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제는 가볍게 아이스팩만 들고 장을 보러 간다.


'물은 유료인데, 얼음은 무료라'


처음 마트에서 무료 얼음팩 문구를 발견하고는 매우 신기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물을 얼음의 형태로 변형시키고 유지시키는 비용이 물의 상태로 있을 때 보다 더 비쌀 텐데, 사람들이 장을 보는 주요 마트들에서 얼음은 무료로 챙겨서 본인의 아이스팩에 넣으면 된다. 이런 소소한 발견들이 새로운 곳에 살면서 만끽할 수 있는 재미가 아닌가 싶다.

여담이지만, 10년 전 업무로 라오스를 방문했을 때 다소 신기했던 것이 어디를 가든 얼음 인심이 후하다는 점이었다. 라오스는 고온다습한 기후대라 열을 식혔는데 얼음이 필수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국가 전체 인구가 5백만 남짓에 수도 비엔티엔은 시골같이 느껴질 정도로 아담했는데, 얼음은 왜 이리도 많을까? 물어보니 라오스는 수력발전소가 많고, 당시 자국 전기수요가 별로 없어서 잉여 전력을 이웃 국가들로 전기를 수출하고도 남아 전기 값이 저렴하다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또한 경제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더운 곳에서 열을 식혀주는 얼음이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라오스의 얼음 인심은 아직도 후할지 기회가 되면 다시 방문해서 확인해보고 싶다.
외국인들이 가는 마트라고는 인식이 있는 Cold Storage
살짝 과거로의 여행을 가는듯한 생각이 드는 일본 마트 Meidi-Ya
이름처럼 가격이 정말 합리적인 NUTC의 FairPrice

동남아 여러 곳에 진출해 있는 일본 식료품점 돈돈돈키의 경우 무료로 제공하던 아이스팩을 이제는 돈을 받고 판매하긴 하지만, 아직도 대다수 주요 마트들은 수돗물을 얼린 얼음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이는 역으로 식료품이 더위에 상하는 것은 이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존과도 직결되는 부분이기에 얼음을 무료로 제공하는 게 아닐까?


지금은 싱가포르 친구의 말처럼 물이 귀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식당에서는 임대료를 내기 위해서 물 값까지 받아야 하고, 마트들에서 얼음을 무료로 제공해 주는 것 또한 물건을 더 많이 팔려는 전략일 수도 있다. 하지만, 경제적인 이면 뒤에 역사적 자연적인 이유가 더 근본 되는 건 아닐지 생각해 본다.


물과 얼음 같은 것인데 상황과 형태에 따라 유료이기도 하고, 무료이기도 한 게 흥미로운 나라 싱가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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