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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디스토피아
<주토피아>

by 영화요원

야생 동물들의 평화롭고 질서 있는 세계를 그린 작품 <주토피아>는 애니메이션 <볼트>와 <라푼젤>의 연출을 맡은 바이론 하워드가 2016년 2월에 선보인 작품이다. 영화 제목에서도 쉽게 유추할 수 있듯이 동물원의 주(zoo)와 평등하고 풍요로운 세계를 뜻하는 유토피아의 합성어인 주토피아가 이 영화의 배경이다.


사실 동물의 세계란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육식동물이 초식동물을, 초식동물이 식물을 주식으로 하는
먹이사슬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반면 이 주토피아의 세계는 일반적인 먹이사슬 관계와 확연히 다른 점을 지니고 있는데 이 곳에서는 맹수들과 힘없는 초식 동물들도 같이 공존하는 사회로 나름의 법칙과 질서가 유지되고 있는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주디 홉스'라는 토끼는 주토피아를 좀 더 나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당근 농장을 하는 고향을 떠나 경찰관이 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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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나 주토피아로 간 주디에게 주어진 첫 업무는 주차단속이었고 업무 도중 불쌍한 여우 닉 부자를 만나게 된다. 어릴 적 친구와의 상처 때문에 맹수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주디는 막상 닉 부자가 '맹수는 위험하다'라는 편견으로 인해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모습에 자신의 지난 생각을 부끄러워하며 닉 부자를 도와준다. 그러나 닉의 본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맹수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된다. 이후 에밋이라는 수달의 실종사건을 전담하여 닉과 함께 사건을 파 해치고 주토피아 사회의 권력자인 시장과 경찰의 비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역동적인 애니메이션을 아이들을 위한 영화라고 단정 짓기에는 어린 친구들이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인공들의 모습이 귀여운 토끼와 재빠른 여우, 느린 나무늘보일 뿐, 내용은 평소 많은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추구했던 스토리와는 차별된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이런 탄탄한 스토리를 지닌 주토피아는 먹이사슬이 존재하지 않는 동물들의 세계를 바탕으로 많은 시각적인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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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토피아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차별화된 점은 평등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초식동물 90% 나머지가 맹수들로 둘러 싸여있는 이곳은 누구든지 뭐든 될 수 있다는 "Anyone can be anything!"을 성적 소수자를 의미하는 가젤이 외치고 있다. 그러나 밖에서 바라보는 주토피아와 그 속은 같은 모습이 아니다. 맹수에 대한 불신으로 아이스크림가게에서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하고 그에 대해 닉은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주인공 주디도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지만 맹수에 대한 불신을 감출 수는 없듯이 말이다. 어느 순간 맹수들의 본능을 분출하는 상황이 오면 그렇지 않은 잠재적인 용의자에게 까지 칼을 들이밀게 된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디즈니가 맹수들을 그려온 방식은 맹수이지만 온순하고 다른 약한 동물들과 함께 공존하는 캐릭터들을 자주 노출시켜왔었다. 예를 들자면 <라이온 킹>의 멧돼지 품바라던가, <공주와 개구리>에 재즈를 사랑하는 악어를 등장시켜 주인공과 더불어 작은 생명체와의 귀여운 케미를 선보였다. 반면 주토피아는 맹수만이 위험한 동물이라고 한정시키고 있었고 이로 인해 또 다른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주토피아에서 드러나는 맹수는 사실 주토피아 사회의 권력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힘이 있는 자가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 힘을 가지고자 하는 작은 양이, 육식 동물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초식동물이 이 사회의 평등과 조화를 막는 원인이 된다. 주토피아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맹수가 아닌 동물이 권위 있는 자리에 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동물들의 동등한 대우를 원하는 동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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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토피아, 유토피아는 어원적으로 현실에서는 발견되지 못하는 사회의 모습이다. 평등을 외치는 전체주의, 사회주의 (세부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긴 하지만)가 성공적으로 지속되는 것을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한 것을 보면 이 사회는 진정 허구인 셈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의 모습을 희망하는 마음에서 그려지는 설정이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영화 속 설정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언급되지 않는 동물들에 대한 평등이 이루어진 사회인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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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등을 향해 가고자 함은 틀림없다. 누구나 잘 살고 언제나 행복한 사회에서 살고자 함은 누구나 동의하는 바일 것이다. 물론 일부 사람들의 견해는 다를 수 도 있지만. 그렇게 우리 사회가 평등으로 한 발짝 나아가기 위해서 가져야 할 마음은 누구에게나 동등한 기회와 자본이 아닌 사회적 소수자, 약자를 적어도 평범한 우리들과 동등한 권리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100만 원의 임금이 아닌 중산층에게는 100만 원 임금과 함께 그에 상당한 세금을,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100만의 임금에 걸맞은 사회적 복지 제도를. 이러한 제도에 대해 문제 삼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입장은 그들의 권리를 위해 왜 우리가 희생해야 하는가 이다. 이에 대한 개인적인 답변은 우리가 국가를 이루고 개인이 공동체라는 사회결속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면 선천적인 것에 대해서는 문제 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본래 타고난 것을 문제 삼으면 인간의 존엄과 더불어 무엇이 인간인지, 과연 누가 인간 대우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로 까지 번지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최소한 본래 타고난 것에 대해 문제 삼지 않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평등하게 살아갈 권리를 쥐어주어야 한다.


따라서 이 아기자기한 애니메이션 주토피아는 단순히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는 단편적인 이야기가 결코 아니며 흔하디 흔한 디즈니의 성장 드라마도 아니다. 주토피아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는 사회에 대한 동경과 희망을 그리는 동시에 실현되지 못할 슬픔을 함께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주토피아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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