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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성을 향하여 <눈길>

by 영화요원

브런치의 두 번째 무비 패스. <눈길>이다. 사실 예전에 TV 드라마로 봤던 기억이 있는데 앞부분만 보고 끝까지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영화 <눈길>은 지금까지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당시 두 소녀가 감당해야 했던 그 무거운 현실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고 싶은 말이 명확하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보여주는 장면과 대사들도 모두 누군가를 향하는 말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끌려간 그 얼어붙은 땅에서 일본군들의 아랫도리를 눈물로 견뎌내야 했던 소녀들은 알려진 인원만 239명이다. 어린 영애가 말했듯이 숨기고 싶고 부끄러웠을 것이다. 고향 땅을 밟아도 편치 못했기에 숨기고 감췄다. 아직 말 못 한 소녀들은 혼자 그 시린 아픔을 견디고 있을 수도 있고 이미 가혹한 현실을 떠나 어쩌면 이곳보다 따뜻한 세계로 먼저 갔을 수도 있다. 그 소녀들에게 위로하고 또 우리가 다시 위로받는 작품이다.







일본군 또는 친일에게 끌려가기 전 유복한 가정의 영애는 꼬질꼬질한 종분이 맘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하나 밖에 없는 오빠 옆에 있는 것이 불만족스러웠다. 어린 종분은 학교도 다니고 코트를 입고 다니는 영애가 그저 부러웠다. 그 당시 여자로 태어나면 남자형제에게 모든 걸 양보하고 수동적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여기서 종분이 그렇다. 주체성이 없고 그저 객체로만 남아 있다. 그런 종분은 주체성 가득한 영애가 부러웠다. 위안소에 끌려간 수많은 소녀들 중 하나 가 된 영애는 가지고 있던 주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면서 느끼는 자괴감과 삶의 목적 상실 때문에 죽으려고 애를 쓴다. 말리는 종분에게 '죽는 게 두렵니? 죽지 못해 사는 게 더 무서워'라고 말한다. 맞다. 인간의 삶이 아닌 짐승처럼 사는 삶은 삶이 아니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좀 더 나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분은 살아서 집에 갈 거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인간답지 못한 순간들의 반복에서 누구나 영애와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살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그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것. 그들의 부조리와 잘못을 알려서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살아야 하는 이유이다. 쓸모없게 되어버리면 그대로 버려지는 그런 위태로운 곳에서 두 소녀는 결국 극적으로 탈출을 한다. 죽고 싶어 했던 영애는 살고자 하고, 살고자 했던 종분은 그런 영애와 함께 고향을 향해 그 아슬아슬하고 차가운 얼음 길을 걷는다. 자신의 오빠에게 시집을 와도 좋다는 영애에게 종분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거절한다. 이때 영애는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든 살아서 결혼도 하고 예쁜 아기도 낳아 그저 평범한 여자의 삶을,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고 외친다. 소녀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서로의 손을 번갈아 잡아주면서 이해하고 위로한다.

그저 찐한 된장국에 시원한 물김치에 포근한 목화솜 이불이면 세상을 다 가질 것만 같았던 소녀 영애는 그렇게 눈 길 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늘이 눈에 시리도록 예쁜 날, 죽으려고 했던 날처럼 파란 하늘이 다시 찾아온 날. 혼자가 된 종분은 가슴에 영애를 담고 고향길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 영화 제목과 보여지는 계절을 보면 눈이 정말 많이 보이는 추운 날들의 연속을 확인할 수 있다. 눈은 하얗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차갑다. 지금까지 여러 문학작품에서 눈이라는 소재는 어려움과 시련의 공간의 장치로 많이 사용되었고 역시 이 영화도 그렇다. 그러나 비슷하게 보이는 목화솜 이미지을 더해 따뜻하고 포용하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보인다. 눈과 목화솜이 번갈아 나오고 영애가 죽기 직전 차가운 눈을 따듯한 목화 이불 마냥 어루만지는 걸 보면서 영애가 그 길 위에 눕겠구나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애에 죽음에 종분은 눈을 이불 삼아 덮어주었고 나는 윤동주의 <눈>이라는 시를 떠올렸다. 눈은 소녀들에게 어려움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소녀들을 순수하게 포용하는 유일한 존재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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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이라는 일본의 독재정치는 우리의 주체성인 이름을 빼앗는다. 조선이라는 나라에 태어나 조선말을 쓰는 조선 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는 천왕을 숭배하고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일본이름으로 개명을 한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정체성을 뿌리 뽑으려고 노력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했다는 게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아직 우리나라 고유의 정체성에 대해 정착을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지만... 이런 이름이라는 요소는 종분이 조선으로 돌아와 위로금 비슷한 것을 받을 때도 드러난다. 자신의 이름으로는 돈을 받을 수 없어서 종분이 아닌 영애로 살아가게 된다. 이 장면은 우리나라의 위안부에 대한 시선과 올바르지 못한 대우 방식을 나타낸다. 그들을 먼저 감싸주고 손 내밀어야 할 사람들은 우리들인데 정작 우리라는 사람들은 그들을 부끄러워하니 침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은 소녀들을 위한 팔찌나 배찌 등의 물품보급이 대중화되고 있지만 본질적인 무언가가 필요함은 사실이다.



현재 늙은 종분은 영애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그녀를 아직까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 말하지 못하는 종분은 그렇게 일평생을 영애라는 이름, 영애와 함께 살아왔다. 그런 종분이 어린 날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학생을 만나면서 속 이야기를 어렵게 꺼낸다. '할머니 잘못 아니에요'와'미안하다고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네가 왜 미안하다고 해'라는 대사는 할머니의 마음을 움직였을 뿐만 아니라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늙은 종분이 어린 학생을 보듬어 줬던 것처럼, 우리는 아픈 시간들을 보낸 그녀들에게 따듯한 손길을 기꺼이 내어주어야 한다.


사실 영화적으로 아쉬움이 많은 작품이다. 본래 드라마 상영을 목적으로 만들어짐을 알고 보아도 그렇다. 연출에 신경 쓴 것들이 많이 보이긴 한다. 구도나 대사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라고 하기엔 조금 부족하고 미흡한 면이 많다. 좋은 내용을 더 좋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다. 종분이 그녀의 온전한 이름으로 살아가는 장면에서 엔딩을 내렸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두 가지이다. 미안해야 할 사람들이 미안해야 한다는 것과 지금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종분이 버스를 기다리면 앉은 자리 뒤로 보이는 의사 안중근의 업적과 기상을 닮자고 하면서 위안부 문제를 우리 스스로가 감춘다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는 남은 그녀들을 위해 부끄러워 아직까지도 말 못 하는 숨은 그녀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정치적으로 확대해 보면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 이전에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시선이 바뀌는 게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라고 사료된다.

올해 1월에 239명의 공식적 위안부 소녀들 중 199명이 사망하였고 최근에 본 삼일절 광고에서는 200명이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사실 숫자는 중요한 게 아니다. 239명의 소녀들이 생존했건 단 1명의 소녀가 생존했건 우리는 계속해서 일본의 부도덕함과 비윤리적인 횡포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를 요구해야 한다. 주체성을 향한 길이 눈길처럼 차갑고 시려워도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nKyhHfzlQps - 서울시 [3.1절, 일본군 위안부] 당신에게 가까이(한예리, 나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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