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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츠심 Oct 24. 2021

우린 결과상으로 완벽한 운명이네요

심리테스트가 이어준 D 이야기

작년에 한창 심리테스트가 유행했다. 매일 같이 쏟아져 나오는 심리테스트를 열심히 풀어대기 바빴다. 결과가 소름 돋게 잘 맞는 것도 있었지만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들도 있었다. 잘 맞지 않는다고 한들 몇 개의 질문으로 날 파악할 순 없을 테니 그러려니 했다. 보통 심리테스트 결과는 내 유형을 알려주고, 나와 잘 맞는 유형 그리고 맞지 않는 유형을 알려준다. 신기한 것은 나와 잘 맞는 유형의 사람들이 은근히 주변에 많았다는 점. 서로 잘 맞는 유형이면 괜한 유대감이 생기기도 했다. 이렇게 쉽게 생길 유대감이었나 허탈하기도 했지.


어느 날 접한 테스트는 내가 명품이 된다면 어떤 명품인지 알려주는 것이었다. 인간 샤넬은 제니, 인간 구찌는 카이, 나는 어떤 명품 일지 궁금했다. 결과는 난 인간 이자벨 마랑 에뚜왈. 도시의 보헤미안이란다. 결과에 대해 조금 설명을 하자면, 자연스러운 멋을 추구하고 말수가 많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며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것은 질색인 사람이라고 한다. 음, 잘 맞네? 난데?


나와 잘 맞는 유형은 주관이 뚜렷한 미니멀리스트, 인간 라프 시몬스. 유행가보다는 인디밴드의 음악을 좋아하고, 박스오피스 탑 10보다는 예술 영화를 좋아하며 비주류의 감성을 지녔지만 합리적인 면모도 갖추고 있어서 실용적인 미니멀 스타일을 선호하는 사람. 분명히 내가 좋아할 법한 사람이 맞다. 아주 확실하게.


 

늘 그랬던 것처럼 당연하게 테스트 결과를 인스타그램에 공유했고 뜬금없이 흥미로운 메시지를 하나를 받았다. "내 주변에 라프 시몬스 있는데 소개팅할래?"인스타그램으로 소식만 알고 지내는 지인이 소개팅 의사를 물었고 잠시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인간 라프 시몬스라는 이유로 만나봐도 괜찮을지 살짝 고민스러웠다. 근데 왠지 정말 잘 맞을 것 같긴 했다. 그리고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으므로 빠르게 긍정의 답변을 보냈다.

 

D와 인스타그램 DM(다이렉트 메시지)을 주고받으며 만날 날짜를 정했다. 이런 소개팅은 처음인지라 황당하기도 하면서 은근 기대가 컸다. B형인 나와 잘 맞는 O형과 소개팅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지만 한낱 테스트가 뭐라고 신뢰가 생겼다. 한낱 테스트 결과이지만 나와 정말 잘 맞는 사람이 나올 것만 같아 때때로 설레기도 했다. 그렇게 우리가 정한 날이 밝았고 우리는 만났다. 지금 생각해보니 심리테스트로 소개팅한 것과 아주 잘 어울리게 서로 번호도 모른 채 만났다. 내가 알고 있는 건 D의 인스타그램 아이디와 인간 라프 시몬스라는 것 외엔 없었다. MZ 스러움이 물씬 난다.


 

첫 만남에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제법 오랜 시간 대화를 했고 꽤나 늦은 시간이 되어서 헤어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건 내 관점에서의 이야기. 그의 생각은 다를지도 모르지.

그와 나는 관심사가 비슷했다. 공통점이 많았다고 말하는 게 맞으려나?

비록 과거일지언정 나는 패션업에 종사했고 그는 현재 패션업에 종사하고 있다. 그래서 둘 다 옷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다. 그리고 우리는 같은 종류의 고양이를 키웠다. 특이하게도 같은 자동차 브랜드에 관심이 있었으며 더 특이한 건 나의 꽤나 비주류인 음악 취향을 그도 제법 좋아했다. 이건 정말 흔하게 볼 수 없는 레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우리의 동선이 많이 겹쳤다. 어느 날은 함께 도산공원에 있었고 어느 날은 함께 상수동에 있었다. 물론 시간은 다르지만 같은 날 같은 공간에 있었다. 좋아하는 동네도 얼추 비슷했다. 여러모로 좋아하는 것들이 비슷해서 대화가 잘 통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D와 한번 더 만났다. 새벽같이 아침 일찍 만나 그의 차를 타고 양양에 가서 막국수도 먹고 바다 앞에 앉아 한창 멍 때렸다. 저녁이 되기 전에 서울로 출발했으나 미친듯한 교통정체로 인해 차 안에서 꽤나 오랜 시간을 보냈고 우리 사이에 적막이 흐를 때가 많았다. 지치고 피곤해서 말수가 줄었던 것이라 믿고 싶다. 첫 만남과는 여러모로 제법 다른 전개. 말해 뭐해, 결론은 잘 안됐다. 하지만 내 주변에 테스트 결과 궁합이 맞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소개팅을 주선해주고 싶다. 잘 될 확률이 높아 보인다. 물론 난 잘 안됐지만.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SNS를 통해 인연을 유지하고 있고 서로의 근황을 알고 지낸다. 심리테스트에선 우리가 잘 맞는 유형이라고 이야기했고 실제로도 나쁘지 않은 조화였지만 뭐, 이렇게 됐다. 잘됐으면 신기하고 재밌고 놀랍고 뭐 그런 감정들로 붕붕 떠있었을 텐데 역시 테스트는 그저 가벼운 재미이자 놀이였을 뿐이었나 보다. 어떻게 보면 가벼운 심리테스트 결과에 의해 부담 없이 만나게 되어서 그런지 연락을 하지 않게 된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불편하지 않았다. 그냥 자연스러웠다. 소개팅도 이렇게 할 수 있다니, 이 MZ 스러운 발상이 나에게 아주 이색적인 경험을 가져다줬다. 덕분에 그는 아직까지도 내 기억에 인간 라프 시몬스로 잘 남아있다. 나도 그에게 인간 이자벨 마랑 에뚜왈로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겠지?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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