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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츠심 Oct 24. 2021

당신의 유쾌함을 잊을 수 없어요

그 시절 유일한 친구 C 이야기


나는 소개팅을 많이 해보진 않았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소개팅이 잘 주선되지 않았다. 선비라 칭하던 지인이 말하길 나는 소개팅과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란다. 그 이유는 소개팅을 가장 많이 하는 봄과 가을을 떠올렸을 때 도무지 내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봄과 가을과는 거리가 먼, 겨울이라고 했다. 겨울에 태어나서 그런 게 아니냐고 했더니 그냥 겨울 같이 생겼단다. 부정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차라리 나는 겨울같이 생겨서 소개팅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위안 삼기로 했다.


손꼽는 소개팅 중 남들은 쉽게 할 수 없는 소개팅을 한 적이 있다. 아마 이런 소개팅을 한 사람은 내가 유일할 것 같은데. 아, 나와 상대방을 포함하면 둘이겠구나.

이 소개팅으로 말하자면, 편의점 소개팅. 들어본 적이 있을 리 없는 생소하고 새로운 소개팅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에 나는 분당에 살았다. 분당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친구들이 놀러 오지 않는 이상 난 그곳에서 항상 혼자였다. 꽤나 외로운 때였지만 외로운 기억으로 남지 않은 건 집 앞 편의점 사장님 C 덕분이다. 집 근처에 몇 개의 편의점이 있었지만 그 편의점에 유독 자주 갔다. 다른 곳에 비해 매장이 크기도 했고 내가 좋아하는 맥주 종류가 다양하게 많았다. 그리고 사장님 C는 너무너무 재밌으신 분이었다.


C와 나는 가을과 겨울 사이 처음 알게 되었는데 처음엔 대면 대면했다. 근데 어느 날부터 사장님이 내 옷차림을 칭찬하시더니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셨다. 패션 쪽 일을 하고 있다고 했더니 자기도 패션업에 종사했다고 하셨다. 유명 브랜드에서 20년 정도 일하시다가 얼마 전에 퇴직하셨다고 했다. 역시 사람은 공통된 주제가 있어야 친해지는 것일까? 그 이후로 C와 나의 거리가 좁혀졌다.


그 후 분주한 출근길에 편의점 앞을 정신없지 지나가고 있으면 언제 나를 보셨는지 불쑥 튀어나오셨다. 그리고 “헤이 걸 굿모닝”이라고 외치셨다. 날 발견할 때마다 한결같이 그렇게 외치셨다. 주변 사람들이 쳐다봐서 조금 부끄러웠지만 덕분에 사장님을 만나는 아침마다 웃음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날씨가 제법 추워진 겨울 어느 날, 발목까지 내려오는 카키색 점퍼를 입고 편의점에 간 적이 있는데 사장님은 그 거적때기는 뭐냐고, 모포 입은 거냐고 놀리시더니 이후 날 모포 아가씨로 불렀다. 편의점에 갈 때마다 모포 아가씨라며 장난치셨다. 아침마다 인사도 해주시고 별명도 만들어주신 사장님. 참 유쾌한 분이셨다.  



여느 때와 같이 편의점에 들렀는데 사장님이 작은 종이 쪼가리 하나를 주셨다. 휴대폰 번호가 적혀있었다. 이게 무엇이냐 여쭤보니 사장님은 이 근처에 사는 근면 성실한 남성의 연락처라며 만나보라고 하셨다. 너무 황당해서 헛헛 거리며 웃었다. 손사래를 치며 거절하니 직접 전화를 거셔서 그분을 편의점으로 불러내셨다. 그렇게 우리는 편의점 한편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머쓱한 웃음만 지어냈다. 자연스럽게 가려는 찰나 예의상 전화번호를 물어보셔서 예의상 알려드렸다. C는 카운터에서 슬쩍슬쩍 안 보는 척 지켜봤고 흐뭇한 미소도 몇 번 지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

연애를 하기엔 서로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라 동네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 당연히 잘 안됐지. 연락하고 지낼 때 책을 몇 권 빌려줬는데 급격하게 서먹한 사이가 되어 책을 돌려받지 못했다. 소개팅도 잘 안되고 책도 잃었다. 얻은 건 없고 잃은 것만 있는 첫 편의점 소개팅. 그 이후에도 C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종 소개팅을 시켜주셨다. 나를 예쁘게 봐주셔서 해주신 소개팅이라는 걸 안다. 늘 혼자였던 내가 외로워 보여서 해주신 소개팅이란 것도 안다. 사장님은 나에게 좋은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단 것도 안다. 하지만 잘 안됐다 항상. 한 번은 잘 될 법도 한데 모두 실패했다. 내가 봄과 가을이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라, 겨울 같은 사람이라 그런 거라 위로하기로 했다.


동네 사람들과 편의점에서 하는 소개팅은 참 불편하고 우스꽝스럽다. 생각만 해도 그 끔찍함에 몸서리 쳐지는 건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끔찍한 소개팅을 사장님이라서 했다. 사장님은 나의 친구였으니까. 그 시절 나의 유일한 말동무는 C였고 그 시절 그는 유일한 나의 동네 친구였다. 지독하게 외로울 뻔했던 그 시절 나의 구원자이기도. 소개팅으로 친구를 만드는 건 실패했지만 C와 더 좋은 친구가 되었던 건 확실하다.


종종 C의 아침 인사가 그립다. 헤이 걸 굿모닝!

잘 지내실까? 여전히 유쾌한 모습으로 계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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