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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츠심 Oct 24. 2021

이름과 얼굴보다 중요한 게 뭐냐면

대화가 잘 되는 B 이야기

B와 나는 인친이다. 인스타그램 친구. 서로 SNS를 팔로우했던 관계가 친구로 발전했다. 언제 팔로우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으나 그가 남긴 피드의 댓글을 보니 2014년 말 혹은 15년 초인 것 같다. 5년 전 무렵 알게 된 5년 지기 친구라고 정리해두자. 알게 된 이유와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아직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SNS로 알게 되었지만 우린 자주 연락하는 사이었다. 처음에는 DM(인스타그램 메시지)으로 대화를 시작했고, 이후 서로 카카오톡 아이디를 교환했다. 그때만 해도 카카오톡 아이디를 주고받는 일은 드물었다. 대게 휴대폰 번호를 주고받았는데 B는 나의 연락처를 물어보지 않았다. 오히려 잘된 일이지 뭐. 그렇게 생각했다.



B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 내 인스타그램에는 나의 솔직함이 과하게 담겨있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더 했다. 반면에 나는 B의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그의 SNS에는 풍경 사진과 자신이 아닌 인물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나이도 몰랐다. 아이디로 추측해보았을 때 성이 권 씨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내 휴대폰에 그는 ‘권’이라고 저장되어있다. B의 이름과 얼굴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며 이름을 알게 되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권’으로 남았다. 나는 그에 대해 얼굴과 이름은 몰랐지만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목소리인지, 어떤 말버릇을 가지도 있는지, 무엇을 힘들어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정도라고 하기에 꽤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와 나는 5년을 알고 지냈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연락은 지속해나갔다. 물론 5년 중 절반의 시간은 그가 해외에서 살았기에 만날 수 없었다. 한국에 돌아오면 얼굴 한 번은 볼 일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도 바쁘고 나도 바쁘고 핑계 아닌 핑계로 같은 한국, 좁은 서울 땅에서 만나지 않았다. 어쩌면 만남 후에 관계가 틀어질까 봐, 서로를 잃어버릴까 두려워 핑계 아닌 핑계를 댔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메시지와 전화는 계속되었다. 얼굴도 한번 보지 않은 사람과 5년 동안 그렇게 지냈다. 친구들은 의아해했다. 어떻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랑 그렇게 지낼 수 있냐고. 그게 무슨 사이이며, 연락을 하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연락을 왜 가까이했는지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매사에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나에게서는 있을 수 없는 대답이었다. 정확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냥 좋은 사람인 것 같다는 확신만 있을 뿐,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 라는 막연한 기다림도 있었고. 그들에겐 5년 동안 얼굴도 모른 채 연락하는 나도, 5년 동안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그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겠지. 그들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반응이었다. 나는 참 무모하고 터무니없는 사람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다. B는 갑작스레 전화를 걸어오더니 “지금 어디예요? 나와요.”라고 무심코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나는 덤덤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어디냐고 물었다. 나의 대답에 당황했는지 그는 호탕하게 웃어댔다. 서로의 툭 던진 말에 만남이 성사되었다. B의 첫인상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확실한 건 처음 보는 사람인데 낯설지 않은 익숙한 느낌을 풍겼다. 우리의 시간이 헛된 시간은 아니었나 보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 같았다. 물론 오래 알고 지냈지만. 얼굴은 모르지만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라는 표현이 맞겠다.

처음 만난 날 그와의 대화는 우리가 늘 전화로 툭툭 던지던 농담처럼 유쾌했고 편했다. 오래된 친구처럼 침묵이 흐를 새가 없는 낯익은 대화였다.


사실 나도 한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B와 왜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연락을 해왔는가? 나는 그와 연애를 하고 싶어서 연락을 하는 것인가? 나는 외로워서 그와 연락을 하는 것인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었다. 그에 대한 이유 모를 믿음도 있었지만 나는 B와의 대화가 좋았다. 흥미롭고 재밌고 뭐 그랬다. 그가 유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어서 재밌었던 게 아니다. 대화가 잘 통했다. 일방적인 대화가 아닌 주거니 받거니가 잘 되는 그런 대화. 어느 날은 지극히 가벼운 대화를 하고 어느 날은 지독하게 무거운 대화를 했다. 1시간 넘게 전화 통화를 할 때도 있었고 3분 만에 메시지가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와 조금 더 대화하고 싶어 새벽에 잠이 든 날도 많다. 어느 날은 휴대폰 너머 들리는 그의 진솔한 몇 마디에 어쩌면 그는 내 인생에서 소중한 사람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예감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와의 대화가 좋았다. 처음 얼굴을 마주 보고 나눈 그와의 대화는 지극히 익숙한 대화이자 5년 동안 좋아했던 그 대화였다. 그리고 오래전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5년 동안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사람과 연락했던 것이 누군가 보기엔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임은 분명하지만 결국 B와 나는 오래된 친구이다. 이제는 남들이 이해할 수 있는 보통의 친구가 되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의 성 하나였지만 이제는 그의 웃는 얼굴도 알고 찡그리는 얼굴도 안다.

무모하고 터무니없는 나의 행동은 인생에 소중한 사람을 만들어냈다. 그 시절의 나의 무모함에 칭찬을 가득히 하는 바이며, 터무니없는 관계 속에서도 대화의 즐거움을 알게 해 준 그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지독하게 흥미로운 대화가 끊이지 않도록 잘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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