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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츠심 Oct 24. 2021

너를 만나는 게 기대되고 기다려지고 그래

좋은 취향을 가진 W 이야기

나는 20대 중반까지는 인디 음악에 빠져있었다. 파고 파도 들을 게 한 가득이라 취향이 변할 틈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직장동료를 통해 새로운 음악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테크노’라는 장르이다. 나는 지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고 있다. 빠-빠빠빠빠-빠와 같은 멜로디 혹은 바꿔 바꿔 모든 걸 다 바꿔 테크노 전사 이정현을 떠올렸겠지. 채정안을 떠올렸을 수도 있겠다. 내가 이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마다 지겹도록 들은 이야기라 충분히 예상했다. 열에 아홉은 위와 같은 반응이고 열에 한 둘은 어? 정말? 이라며 눈빛이 반짝이며 목소리에 반가움이 묻어난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테크노 음악 또한 흔하게 듣는 장르는 아니다. 마니아층만 아름아름 듣는 음악이지만 꽤나 깊고 두텁게 형성되어 있다.


2018년 가을, 이십 대 후반을 달리던 나에게 다가온 이 음악은 나를 미치게 했다. 푹 빠진 것을 넘어서 미쳐있었다. 일하는 내내 이어폰에선 두둠칫 두둠칫 잔잔하게 흥을 유발하는 테크노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테크노 음악과 함께라면 퇴근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주말이면 테크노 음악이 나오는 가게와 클럽을 도장깨기 하기 바빴고 페스티벌도 섭렵했다. 페스티벌 장소가 서울에서 다소 먼 남양주라고 해도 그 거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미쳐있는 나에게 그 거리는 보이지 않았다.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가야만 했다. 너무 좋으니까.



W와 나는 남양주에서 열린 테크노 페스티벌에서 만났다. 밤새도록 이어지는 음악은 사람들을 미치게 했고 취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음악과 술에 취해있었다. 나도 취하려던 찰나 한 친구는 제대로 취해버렸고 남은 한 친구는 휑하니 집에 가버려서 정신을 바로 잡을 수 밖에 없었다. 나에게 정신이 흐릿해질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먼저 취했어야 하는데 눈치게임 나의 패배로 돌아왔다. 취한 친구는 자꾸만 어디론가 사라졌다. 사교성이 좋은 그 친구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그 순간을 즐겼다. 사교성이 다소 떨어지는 나는 어쩌다 보니 혼자 놀게 되었다. 의외로 혼자 노는 것도 재밌었다.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라는 건 이런 건가? 혼자 놀아도 재밌는 것. 혼자여도 상관없는 것. 역시 국가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답다.


꽤나 긴 시간 혼자 놀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W와 눈이 마주쳤다. 그 찰나의 순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혼자라는 것을. 이야기를 해보니 나의 친구는 나를 버리고 다른 이와 놀고 있었고 그의 친구는 그를 버리고 가버렸다. 우리는 각자 다른 이유로 친구들에게 버림받아 혼자가 된 처지끼리 서로의 옆을 지켰다. 중간중간 술잔도 마주치고 대화도 하며 그 순간을 재밌게 보냈다. 사실 조금 외로울 뻔했는데 덕분에 외로움을 사라졌다. 그날 이후 우리는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았고 시간이 되면 만났다. 음악 이야기도 하고 회사 이야기도 했다. 때때로 친구 이야기도 하고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그가 직접 작업한 음악을 듣기도 했고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다. 그러다가 한동안 연락이 끊기기도 했지만 이내 테크노 음악이 나오는 곳에서 그를 마주칠 수 있었다. 그 음악이 있는 곳엔 W가 있었다. 어쩌면 그의 입장에서도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 음악이 있는 곳엔 그녀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수많은 다양한 노래를 들어오던 나는 평균 이상의 넓은 음악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해왔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W는 나보다 훨씬 더 넓은 음악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깊기도 했다. 내가 귀담아듣지 않는 분야까지 섭렵하고 있었다. 그의 노래 추천은 항상 내 손가락을 바쁘게 했다. 추천곡을 차곡차곡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하고 몇십 번을 돌려 들었다. 그가 추천해준 노래 중 유독 질리도록 들었던 곡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와 Guns N' Roses의 Knockin’ on heaven’s door. 함께 갔던 LP바에서 작은 종이에 적어냈던 그의 신청곡이기도 하다. 지금도 여전히 잘 듣고 있는 노래. 그와 잘 어울리는 노래여서 일까? 들을 때마다 그가 떠오른다. 내가 정한 W의 테마곡이다.  


내가 그를 좋아했던 이유는 음악적 취향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전반적으로 취향이 좋은 편이다. 삶의 여러 부분에서 괜찮은 취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것은 내 기준이겠지만 나는 그의 취향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가 추천하는 음악은 두말하면 잔소리며, 책, 영화, 짧은 유튜브 영상, 심지어 웃긴 짤 마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심지어 직접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것도 좋아 보였다. 그를 알면 알수록 이런 취향은 어떤 삶을 살아야 가질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나에겐 절대 없는 취향을 그는 가지고 있었고 그 취향은 아주 탐나는 취향이었다. 살면서 대게 외모나 성향이 마음에 드는 일은 많았지만 취향에 사로잡힌 건 처음이었다. W와 나는 한 계절에 한번 정도 만나곤 하는데 만나고 나면 늘 다음 계절을 기다린다. 이번엔 어떤 좋은 곳으로 나를 데려가 줄지, 어떤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줄지, 어떤 재밌는 콘텐츠를 추천해줄지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갔던 이태원의 LP바도 좋았고 경복궁의 한옥 와인바도 좋았다. 안국역의 막걸리 집도 아주 좋았지. 그와 함께 봤던 보헤미안 랩소디는 단연코 최고였고. W의 멋진 취향은 늘 나를 만족으로 이끈다. 아니, 만족을 넘어서 흡족이다.



나에게 취향은 성향만큼 중요하다. 나는 내 취향을 좋아하고 내 취향에 만족한다. 고로 더 좋은 취향, 멋진 취향을 가지고 싶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생각을 바꿔놓았다. 멋진 취향을 가진 사람은 좋은 성향을 가진 사람만큼 매력적이다. 어쩌면 더 매력적일지도 모르겠다. 멋진 취향과 함께 좋은 성향도 겸비한 그는 얼마나 미친 듯이 매력적인 사람인 걸까? W는 오랫동안 잘 지내고 싶은 사람 중 하나이다. 살면서 좋은 영향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게 잘 될지는 모르겠다.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과연 다음 계절에 만나는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게 될까? 나도 모르게 기약도 없는 그 계절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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