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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츠심 Oct 24. 2021

너랑 나 우리 둘만 좋아해도 괜찮아

내 취향을 좋아하는 L 이야기


어릴 때부터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을 좋아했다. 텔레비전을 보는 것보다 라디오 듣는 것을 즐겼다. 공부할 때도 들었고, 자기 전에도 들었다. 학교와 회사를 가기 전에도 들었다. 내 인생에 꾸준한 것이 몇 없는데 라디오 듣는 것은 참 꾸준하게 했다. 배철수 아저씨의 프로그램에선 팝송을 듣고 FM 영화음악에선 OST를 들었다. 그리고 굿모닝 FM, 두 시의 데이트에선 당대 유행하는 인기가요를 들었다.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듣는 날이면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아마도 라디오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내가 음악에 대해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게 된 것은.



L을 떠올리면 인디 음악이 떠오른다. 지금이야 인디 음악이 많이 활성화되었지만 10년 전쯤엔 그렇지 않았다. 지금도 주류 음악은 아니지만, 그때는 정말 비주류 음악이었다. 내가 듣는 노래를 많이 아는 사람이 없었다. 때때로 무슨 그런 노래를 듣냐며 의아쩍은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 숨어서 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음악 취향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혼자 들었다. 그는 사람들의 의아한 눈초리를 피해 비밀리에 혼자서만 듣던 나의 음악 취향을 유일하게 이해하고 공감해주었던 사람이다.


어쩌면 L은 인디음악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겠다. 자유분방한 인디음악과 외형적으로 참 잘 어울리는 사람. 그를 처음 봤을 때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우리 과에 저런 사람이 있어? 저런 사람 한 번 만나보고 싶다.” 이 두 마디를 친구에게 속삭였다.

우리 과는 디자인과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대에 소속되어있던 학과라 다른 디자인과에 비해 얌전했다. 미적 감각이 뛰어나 보이거나 예술성이 짙어 보이거나 자유분방해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다. L이 등장함으로 우리 과에 대한 이미지가 와장창 깨졌다. 그는 우리 과에서 찾아보기 힘든 미적 감각이 뛰어나고 예술성이 짙어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스타일이 멋있는 사람. 그 시절 말로는 간지 난다고 표현했지. 그 시절 그런 부류의 사람은 나의 로망이었고 그런 사람과 만나보고 싶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귀어보고 싶었다. 연예인을 제외한 사람에게는 처음으로 해본 말이다. 아 이 사람이랑 사귀어보고 싶다.



나는 2학년, 그는 3학년으로 같은 수업을 듣지도 않고 이래저래 딱히 친해질 계기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감사하게도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는 옷을 좋아했다. 나는 그의 옷차림을 볼 때마다 어쩌면 저렇게 센스 있게 입었는지 감탄했고 그는 나의 옷차림을 볼 때마다 어쩌면 그렇게 잘 소화해서 입었는지 감탄했다. 만날 때마다 서로 옷차림을 칭찬하기에 바빴고 때때로는 동경의 눈빛을 숨길 수 없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쇄골이 보이는 U넥 라인의 하얀색 무지 티셔츠에 강렬하도록 새빨간 체크 타탄 셔츠. 긴 다리가 더 돋보이는 검은색 슬랙스에 과하지 않은 클래식한 클리퍼 슈즈. 이 착장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최애 착장으로 기억된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그는 뭐랄까, 그 시절 나에게 뮤즈. 뭐 그런 존재였다.


옷을 통해 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고 서로에 대해 차츰 알아갔다. 우리에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음악, 정확히 말하자면 인디 음악이었다. 둘 다 음악 듣는 걸 좋아했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인디 음악에 빠져있었다. 그 시절 우리의 최애 가수는 브로콜리 너마저였다. 앵콜요청금지, 청춘열차, 유자차, 꾸꾸꾸. 아직도 기억하는 그 시절 좋아했던 노래들. 멜로디가 들리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사를 이어나가며 흥얼거리곤 했다. 브로콜리 너마저를 시작으로 우리는 많은 인디 가수들을 알아내고 공유했다. 신이 났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그 무렵 음악에 대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것 같다. 신이 났으니까. 이 좋은 걸 같이 할 사람이 있으니까.



나는 왜 인디 음악을 좋아했고 우리는 왜 인디 음악에 빠지게 되었을까?

인디 음악은 자유롭고 진솔하면서 예쁘기까지 한 문장들로 이뤄진 가사가 많았고 기타 혹은 피아노 하나로 담백하면서 깊은 멜로디를 만들어낸 곡이 많았다. 서정적이면서 틀에 박히지 않은 느낌이 물씬 나는 인디 음악이 좋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음악을 듣는다는 희소성도 좋았다. 나만 아는 가수, 나만 아는 노래. 그걸 굉장히 즐겼다. 혼자 들으면서 외로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희소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인디 음악에 빠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걸 함께 즐길 사람이 있었다는 것. 즐거움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취향을 즐기는데 여러 명은 필요 없다. 딱 한 명만 있어도 그 취향을 더 즐겁게 즐길 수 있게 된다.  


여전히 나는 인디 음악을 듣는다. 예전만큼 푹 빠져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여전히 관심을 가지고 듣는다. 그리고 그 시절처럼 여전히 L에게 음악을 공유한다. 10년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그는 “좋다”라는 말과 함께 이에 질세라 자신이 듣는 노래를 공유한다. .L의 추천곡 또한 어김없이 좋다. 그도 여전히 인디 음악을 듣는다.

나의 음악 취향은 한결같이 비주류를 향하고 있다.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음악은 의아한 눈총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이 비주류 취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나의 취향을 인정해주고 존중해줬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는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있다. 이것은 10년 전 그가 나에게 준 깨달음이자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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