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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츠심 Oct 24. 2021

가까울수록 좋을 줄 알았지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가장 멀어진 H 이야기

H와 나는 고등학생 때 알게 된 친구이지만 고등학교 동창은 아니다. 고등학교 시절 다닌 미술 학원에서 알게 되었다. 서로 인사는 하지 않으나 이름과 얼굴만 아는 그런 사이였다. 그런 관계였던 그녀와 나는 수시에 합격하여 미술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부터 가까워졌다. 대학생이 된 이후엔 서로의 학교가 수도권에 있어 자주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미술학원, 고향, 수도권 대학 이 세 가지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 나는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집을 분당으로 이사했다. 나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곳에서 편의점 사장님과 동네 술집 사장님을 벗 삼아 꽤나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 무렵보다 조금 지난 시기, 내가 회사에 막 적응했을 무렵 H 또한 회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시절 그녀는 기숙사에 살고 있었는데 학교와 회사의 거리가 꽤나 멀었다. 고민하던 그녀는 내게 우리 집에 신세를 져도 되겠냐고 물었고 나는 아주 당연하게 승낙했다. 그것으로 우리의 동거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흔쾌히 시작된 동거는 순탄하지 않았다. 그녀조차 모르고 있던 고양이 알레르기를 하루 만에 발견했고 그로 인해 늘 재채기와 콧물을 달고 살았다. 비로소 혼자가 아니게 되었는데 고양이 알레르기는 우리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렇게 H와 짧은 동거는 끝났고 우리는 밖에서 종종 만났다.


우리가 더욱이 가까워지게 된 것은 내가 강남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녀의 회사는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 위치했고 그로 인해 우린 퇴근 후 자주 만났다. 때때로 술을 많이 마신 날엔 그녀는 우리 집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내 옷을 입고 출근했다. 어느 날은 그녀가 그녀의 친구들과 근처에서 거하게 술을 마시고 재워달라고 왔다. 그날 밤 12평의 우리 집엔 5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고양이가 가득 채운 채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친구들까지 재워줬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친구니까 그랬던 것 같다. 나는 마음이 가는 사람에게 간도 쓸개도 다 빼준다.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려고 하고 더 해줄 게 없나 두리번거린다. 그 시절 나는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H는 강북에서 강남으로 출근하는 것이 벅찼고 결국 나와 회사가 있는 강남으로 이사했다. 그녀가 이사하던 날 이삿짐을 함께 나르고 근처 중국집에서 짜장면도 먹었다. 우리의 돈독한 사이만큼이나 가까워진 집은 우리를 더욱 자주 만나게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절 우리는 술과 자전거에 푹 빠져있었다. 퇴근 후 보통의 날엔 맥주잔을 부딪히며 직장 상사의 험담과 연애 상담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기분 전환이 필요한 날엔 말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밤의 한강으로 달렸다.

약속이 없는 주말엔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여기저기 쏘다녔다. 우리는 술 아니면 자전거였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열정적으로 마시고 열정적으로 달렸다. 그렇게 우리는 가까이 살면서 정말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가까운 거리는 서로에게 독이 되었다. 가깝고 편하다는 이유로 서로 툭툭 말을 내뱉는 경우가 많았고 약속도 자주 어겼다. 우린 어느 날부터 서로의 말투와 행동이 거슬리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작고 잦은 다툼이 시작되었다. 서로 회사 일로 인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는데 엉뚱한 방향으로 불똥이 튄 거다. 친하다고 해서 어떤 말과 행동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일삼았다. 그 시절 그녀와 나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날이 선 말들을 이해할 여유도, 화가 가득한 기분을 배려할 여유도 없었다. 다툼이 생길 때마다 그녀가 미웠다. 그녀도 내가 미웠겠지. 그러나 미운 것도 잠시 우리는 곧 화해했다. 하지만 작고 잦았던 다툼은 크고 잦은 다툼이 되었고 우리는 크게 싸웠다. 2번을 크게 싸우고 나니 우리는 서로 등을 져버렸다. 우리는 서로 맞지 않는 사람임을 인정하고 나니 서로의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더 이상 미운 감정을 가질 일이 생기지 않았다. 우리의 가까움은 예상치도 못한 순간 문제를 일으켰다.


사실 우리는 서로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잘 맞는 부분보다 맞지 않는 부분이 더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서로에게 아주 가까운 친구이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려고 노력했다. 서로를 잃고 싶지 않았으니. 하지만 어느 순간 감정은 뻥 터져버렸다. 그렇게 끝이 났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가끔 그녀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지만 괜한 자존심에 그녀의 SNS를 염탐하지도 않았다. 그녀와의 끝은 마치 남녀가 진절머리 나도록 피 터지게 싸우고 헤어진 이별 같았다. 나는 그녀와 헤어졌다. 가장 가까웠던 우리는 가장 먼 남남이 되었다.  



H와 나는 같은 건물에 살았음에도 우리가 헤어진 후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이상할 만큼 마주치지 않았다. 우연히 그녀를 만나게 된 건 3년 만의 일이었다. 그녀는 무심하게 “잘 지내?”라고 물었고 나는 응 오랜만이네 라고 답했다. 짧은 안부를 묻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출근길로 향했다. 그냥 모른 척 지나가지 그녀는 왜 안부를 물었을까, 그녀의 한 마디에 하루 종일 마음이 시름시름 앓았다. 헤어진 전 남자 친구와 마주쳐서 어정쩡한 인사를 나눴는데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구질구질한 전 여자 친구, 그게 나였다. 이걸 계기로 우리가 다시 잘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망상이었다.


그녀를 아는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그녀와 다시 잘 지내볼 생각이 없느냐고. 그때는 여전히 그녀가 미웠고 그래서 단호하게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한두 해가 지나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은 그녀를 미워했던 마음은 사라졌고 되려 그녀와 좋았던 기억이 마음에 남았다. 그때로 돌아가도 나는 그녀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를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독여주고 그녀의 짜증을 웃으며 넘겨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의 나에겐 여유가 생겼고 그녀 또한 여유가 생겼으리. 이젠 서로에게 한 발자국 물러설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리. 부디 이것은 망상이 아니길 바란다.


우리의 인연의 끈은 엉키고 엉켰지만 끊어지진 않았다면 언젠가 우리가 다시 재회할 날이 오지 않을까

나는 또 미련 남은 전 여자 친구이자 전 남자 친구처럼 굴었다. 나는 H를 잊을 생각이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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