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관계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관계에도 관성이 있어서, '나쁜 관계' 혹은 '나를 해치는 관계'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관계가 결코 내게 좋을 리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랑, 또는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그 불구덩이 속으로 절박하게 뛰어드는 사람들 말이다.
어쩌다 한두 번은 '고약한 인연' 탓을 할 수 있겠으나, 이런 관계를 반복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더라도 비슷한 패턴을 유지하며 아파한다.
문제는, 이들이 자꾸만 나쁜 관계로부터 다치고 아파하면서도 본질적인 문제를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처만 주는 그 사람에게 내가 자꾸 뭔가를 희생한다면 결국 진심을 알아줄 것이라고 자위하거나,
정말 괜찮은 사람을 만나면, 진짜 다정한 사람을 만나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 여기며 끊임없이 '어딘가에 있을' 인연을 찾아 헤맨다.
관계의 관성을 스스로 끊지 못하는 까닭이다.
영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서 마츠코는 언제나 자신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곁의 사람을 볼 줄 모르는 남자나 아주 폭력적인 남자 혹은 유부남.
나쁜 관계를 맺는 그 도가 지나쳐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고, 결국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리고 만다.
마츠코의 이러한 관계 맺기 패턴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충분한 사랑을 주지 않는 아버지를 웃게 하기 위해 언제나 마츠코는 고민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그를 웃게 할 방법을.
사랑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했던 그녀가 성인이 되어 자신을 희생해야만 유지할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조건 없이 사랑받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터.
영화는'나쁜 관계만 골라 맺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파괴하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마츠코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받기 위해 애쓰는 노력도 아니었고,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해줄 남자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바로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영화 중간에 '한 사람의 가치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받았는가 보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해주었는가에 있다.'는 문장이 나오지만,
이 문장이 바르게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랑을 주는 사람의 '자아존중감'이 반드시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자존감은 자신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존중해주지 않는 이들과의 관계를 깔끔하고 단호하게 정리할 수 있는 능력과 같다.
타인의 무례한 행동에 분노할 수 있는 용기이기도 하다.
또한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좋은 사람을 만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성복 시인은 '사랑은 자기 반영과 자기 복제'라고 했다.
나쁜 관계를 자꾸만 반복하는 것은,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는' 자아의 반영이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무슨 목적이 있어 빠지겠느냐마는 일단 관계를 맺게 되었다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는 있다.
그것은 열정도 아니고 설렘도 의리도 아니다.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바라보고 흘러가야 할 방향은 '성장'이다.
문화와 문화가 만나면서 새로운 문화가 창조되는 것처럼, 각자의 세계를 살아가던 개인과 개인이 만나 사랑을 하며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세계가 다른 한 사람의 세계를 덮쳐버리거나, 파괴해버리는 관계는 성장은커녕 만나지 않느니만 못하다.
마츠코는 일생을 사랑받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결국은 혼자 쓸쓸히 남겨졌다.
"태어나서 죄송하다"는 그녀의 울부짖음이 아직도 메아리친다. 태어나서 죄송한 사람은 없다.
엄마가 아기를 아무 조건 없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사람은 존재만으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건강한 관계는 좋은 인연과의 만남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바로 세우고 스스로 사랑하는 능력을 키우는 일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