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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레이 Mar 02. 2017

그래, 이 맛에 쓰는 거지

요즘 들어 무척이나 부러운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바로 어릴 때부터 일기를 착실하게 쓴 사람이다. 중간에 일기 쓰기와 멀어졌다고 해도, 초등학생 때만큼이라도 일기를 착실하게 썼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그렇게 신기하고 부러울 수가 없다. 심지어는 쓰면 쓸수록 한 줄이 두 줄이 되고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하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어린 나리에 그게 정녕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신기함은 경탄으로 부러움은 존경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꿈에 그리던 연예인과 대화할 기회를 얻은 어린 팬처럼 이것저것 캐물었다. 어찌나 부럽던지, 가능하다면 그의 어린 시절과 나의 어린 시절을 바꾸고 싶었다. ‘나도 어릴 때부터 일기를 열심히 썼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똑똑하고 글도 잘 썼을 텐데….’  

 나의 질문 세례를 받은 사람은 당황해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나며. 그런 사람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나는 갖지 못한 재능을 갖고 있을 거 같아서다. 어린 시절부터 그 지겨운 일기를 열심히 쓸 정도라면 분명 작가의 기질을 타고난 게 틀림없을 거라고 믿는다. 친구도 없고 집에서 할 게 없어서 사전을 읽었다고 말하는 학자나 집 한켠에 쌓여 있어 신문을 읽으며 놀았다고 고백하는 소설가처럼, 어릴 때부터 일기를 꼼꼼히 쓴 사람이라면 적어도 남들보다 이른 시기에 글에 대한 재능을 보였고 글쓰기 훈련을 많이 했을 테니 말이다. 기질이 재능이 되었을 테고, 자연스럽게 재능이 노력을 불러왔을 것이다. 

 반면에 나는 책도 안 읽고, 일기도 쓰지 않는 아이였다. 해가 되는 내용이라도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고등학생 시절 선생님이 꼭 읽어 오라며 숙제로 내준 책을 기를 쓰고 안 읽었고,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초등학생 시절로 가면 일기를 죽을 둥 살 둥 한두 줄 끄적인 다음 담임 선생님에게 제출하는 게 고작이었다. ‘오늘은 ○○ 장기를 뒀다. 재미있었다. 내일 또 해야겠다.’ 함께 노는 친구도, 하는 놀이도 매일 같았으니, 컴퓨터로 문장을 그대로 따서 붙여 넣은 듯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대단히 성실하거나 문필가의 기재를 타고난 몇몇 학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랬겠지만, 방학 때는 개학을 며칠 앞두고 몰아서 쓰는 게 예사였다. 한번은 그 만행이 아빠에게 발각되어 아빠의 발뒤꿈치에 어깨를 가격당했다(일기를 밀린 게 발로 맞을 정도의 잘못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아프기도 아팠지만 아빠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맞아본 터라(매를 통한 훈육은 전적으로 엄마가 담당했다. 자녀교육의 분업이 확실했던 걸까) 그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혹 그때의 아픈 기억 때문일까. 그날 이후로 일기를 더욱 더 적극적으로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나름대로의 반항이자 항명의 표시가 아니었을까. ‘같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어린 시절의 기억이 이후의 성장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는 누구도 정확히 알기 힘들고 많은 경우 그때의 기억은 현재의 나에 맞춰 조작되거나 윤색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일기를 안 써서 맞았고 그때 이후로도 변함없이 안 썼으며 초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일기와 안녕을 고했다. 만져서는 안 되는 1급 위험물인 양 일기장 근처에 가지도 않았고 손도 대지 않았다. ‘오호, 이제 썼는지 안 썼는지 검사하는 사람도, 안 썼다고 때리는 사람도 없다!’

 끈질긴 지적과 과격한 폭력이 사라졌다고 해서 왠지 모를 죄책감까지 지워지지는 않은 모양이다. 비록 성실히 임하지는 않았지만, 일기는 중요하고 필요하고 좋은 것이라는 족쇄가 머릿속 깊숙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교육의 힘인가. 따지고 보면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 어디론가 배우러 다닌 이후부터 우리는 일기 쓰기의 수많은 좋은 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 정도로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으면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게 될지 모르지만, 사실 일기 쓰기의 장점으로 말해지는 것 중 어느 모로 보나 수긍할 만한 부분도 많았다. 

 그렇게 일기와 내외한 지 십 년쯤 지났을까, 일기 쪽으로 손을 내미는 일을 시도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탓인지 친근해지기가 쉽지 않았다. ‘이건 쓸데없이 두꺼워서 무겁기만 해’ ‘이건 날짜별로 나뉘어 있어서 별로야’ 일기를 제대로 써본 적이 없으니 나에게 맞는 일기장이 어떤 건지 알 턱이 없었고, 일기의 중요성을 피부로 느낀 적이 없으니 일기장에 만 원 이상의 돈을 쓰는 건 낭비라고 여겨졌다. 쓰다가 포기하면 고스란히 돈 낭비가 될 수 있으니 많은 돈을 쓰기 조심스러웠다. 비싼 돈을 쓰면 돈이 아쉬워서라도 꾸역꾸역 쓰게 될지 모르지만, 내 자신을 내가 신용할 수 없으니 섣불리 지르기도 쉽지 않은 노릇. 그렇다고 만 원 이하의 일기장을 사기에는 폼이 안 나는 거 같아 내키지 않고. 

 ‘내가 일기를 쓰지 못한 건 나에게 딱 맞는 일기장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구도자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그분을 차분하게 기다리는 수밖에.’ 일기 쓰기는 기약 없이 멀어졌다. 유예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당연히 나이도 늘어갔고 연이어 핑계거리도 늘어났다. ‘이제는 좀 일기를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지금에 와서 써봐야 무슨 소용이냐, 이미 늦어버렸어. 쓸 거면 어릴 때부터 써왔어야지’ 하는 생각이 어디선가 빠르게 튀어나와 새치기를 했다. 일기 쓰기는 멀고 핑계는 가깝다. 

 “우리 끝난 걸까?” “바보야, 아직 시작도 안 했잖아!” 영화 <키즈리턴>의 명대사는 나를 위한 말이었다. 제대로 해보지 않았으니 아직 실패한 건 아니었으므로, 한번쯤은 시도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아직 겪어보지 않았으니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도 알 수 없다. 혹 못한다고 해도 그 문제는 스스로 여실히 깨달은 뒤에 고민하면 된다. 반대로 일기 쓰기에 대단한 재능을 갖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위에 덥힌 약간의 흙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거였을지도. 물론 일기조차 쓰지 않고 보낸 지난 시간이 아쉽긴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오늘의 나와 잘하는 수밖에, 내일의 나에게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답답함과 후회, 핑계와 변명만 늘어가던 중 일기장 한 권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표지에 ‘"1 PARAGRAPH" DIARY’라는 글자가 간결하게 쓰여 있는, 아주 깔끔한 디자인의 일기장이다. 보는 순간 이거지 싶었다. 작고 가벼워 들고 다니기에 부담이 없어 좋았고, 무엇보다 특정 연도에 맞춰서 제작되지 않아서 좋았다. 2017년 오늘 사도 2020년에 쓸 수 있다. 내 맘대로 날짜를 적고 그 날의 일이든 생각이든 내키는 대로 적을 수 있다. ‘1 Pharagraph’라는 말 덕분인지 아주 짧게 써도 스스로 민망해지거나 창피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차피 ‘한 단락’용 다이어리니까. 미리 정해져 있는 틀이 없으니 적어도 네모난 종이 안에서는 무엇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약 6개월 만에 일기장의 마지막 쪽을 채웠다. 그렇게 일기 쓰는 재미를 조금씩 알아간다. 쌓여가는 일기장이 한 권, 두 권 늘고 예닐곱 권에 이를 때쯤이면 일기장은 내 일상에서 빼놓기 힘든 무엇이 되어 있을 것 같다. 다 쓴 일기장을 찬찬히 넘겨보다가 어쩌면 어릴 때 일기를 열심히 쓰지 않은 것에 대한 아쉬움에 대한 위로의 말이자 앞으로의 일기 쓰기에 힘을 북돋아주는 응원의 말을 발견했다. 삐뚤빼뚤한 글씨지만 당시에 꽤나 진지했는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매일 일정한 분량을 일정한 시간 동안 꾸준히 써가는 거죠. 매번 영감을 기다릴 수는 없어요.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태도더라고요." 소설가 백영옥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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