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인터넷에서 중고책 한 권을 샀다. 당장 읽을 거도 아니면서, 감별사라도 되는 양 받자마자 여기저기 펴보고, 저자 소개와 목차를 한번 골똘히 읽어봤다. 그렇게 잠깐 훑어본 것만으로도 똑똑해진 것 같은 착각에 취해 기분 좋게 책장에 꽂아놓으려던 찰나, 책의 아랫부분에 푸르스름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홍보용.' 파란색 잉크의 글씨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책장으로 향하던 팔의 방향을 돌려 책상에 책을 다시 올려놨다. 출판사에서 홍보용으로 배포한 책이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왔을까. 미루어 보건대, 이 책을 처음 건네받은 사람은 기자였을 게다. 혹은 서평을 비롯해 책에 대한 많은 글을 쓰는 프리랜서 작가이거나. 그럼, 그 사람은 이 책을 어쩌다 헌책방에 팔게 된 걸까. 이사를 가며 먼지 쌓인 책의 목록을 한번에 처분한 것이거나 모처럼 회사에서 쓰는 책상과 책꽂이를 청소하는 김에 몇 개월간 쌓인 책들을 정리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받은 책을 다 읽은 후 한번 읽어보라며 지인에게 주었는데 그 사람이 헌책방에 판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또 몇 가지 상황을 가정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는 컵라면을 뚜껑 위에 올려놓을 용도 외에는 그 쓸모를 찾기 힘든,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무가치한 책으로 판단한 경우다. 어차피 안 좋은 책이니 이왕이면 컵라면 값이라도 벌겠다는 요량으로 헌책방에 팔았을 수도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혼자만 보기에는 아까운, 혼자만 봐서는 안 되는 책이라는 강렬한 느낌을 받은 경우다. 게다가 홍보용으로 받았으므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널리 알리고 읽기를 권해야 한다는 모종의 책임감을 갖고 한 명의 독자라도 늘릴 수 있는 경로 중 하나인 헌책방을 택한 것이다.
이외의 이런저런 이유가 또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유가 수백 가지에 이르더라도 홍보용으로 받은 책을 헌책방에 판 일은 정당화되기 힘들다. 선물로 받은 물건을 밖에 내다 파는 행위가 선물을 준 사람의 성의와 노고를 저버리는 일인 것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에 주는 건 몰라도, 누군가로부터 받은 선물을 돈으로 바꾸는 건 어딘지 모르게 마음에 걸린다. 그게 우리가 흔히 예의라고 말하는 세상사의 암묵적인 룰이 작동하는 방식 아닐까. 홍보용 증정과 선물은 목적 자체가 다른 만큼 분명 각각 다른 기준으로 봐야 하고, 한편으로는 홍보용이든 선물용이든 남에게 받은 물건을 돈으로 바꾸는 게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기야, 책을 받는 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의 표시인 저자의 싸인이나 개인적인 사연이 담긴 짧은 글이 맨 앞에 쓰여 있는 책도 헌책방에 버젓이 돌아다니는 요즘이다. 문제는 선물이냐 홍보가 아니라 책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시인으로 활동하고 편집자로 일한 시미즈는 세 들어 사는 2층 방에 한두 권씩 책을 놓다 보니 그 양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 2층짜리 목조 건물이 기울어지는 지경에 이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그 많은 책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그는 버리거나 태우는 쪽을 택했다.
“회사에서 받은 책은 동료가 만든 책이잖아요.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의 책이라 팔지는 못하겠더군요. 하지만 시 비평을 시작하고 전국에서 시집이 몰려들 땐, 그 양이 엄청났어요. 1년에 수백 권 단위였죠. 그래도 그걸 팔아서 돈으로 만드는 것은 견딜 수가 없으니 대량으로 모이면 쓰레기 버리는 날에 밖에 내어다 놓았어요. 파는 것보다야 태우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 오카자키 다케시, 『장서의 괴로움』, 정수윤 옮김, 정은문고, 2014.
책을 팔면 얼마간의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들여 책을 만든 이에게 미안해서 팔지 않은 것이다. 1938년생이라 그런지 몰라도, 고지식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순수하고 낭만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 사실 홍보용 책을 헌책방에 판 사람을 비난할 자격이, 동료가 만든 책을 태울지언정 팔지 않는 시미즈의 고고함에 감탄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다. 내 손에 들어온 그 홍보용 책이 출간된 지 채 3개월도 지나지 않은 책이기 때문이다. 몇천 원 아끼겠다고, 번역자와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손을 막 떠나 마케터가 서점 광고를 조율하고 홍보 방법 때문에 골치를 썩는 신간을 얌체처럼 헌책으로 구매한 것이다.
크고 작은 회사에 가스를 납품하는 일을 하는 아빠는 마트에 갈 때마다 그 회사의 제품을 샀다.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다른 회사의 제품에 비해 성능이 떨어져도, 다른 회사의 비슷한 상품이 세일을 하고 있어도, 자신이 가스를 납품하는 업체의 제품을 몇 개씩 집어 계산대에 올려놨다. 그렇게 아빠에 손에 이끌려 우리 집에 도착한 것 중 찰떡파이로 유명한 청우식품의 여러 과자가 기억에 남는데, 아빠가 몇 박스씩 들고 올 때마다 나는 한두 마디씩 툭툭 내뱉었다. “별로 맛도 없는 걸 왜” “아직 집에 많이 남았는데 굳이.” 있으면 어차피 맛있게 먹을 거면서. 하지만 롯데나 오리온에서 나온 과자가 더 맛있는 게 사실이니까. 나의 볼멘소리에 대한 아빠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 “거기서 과자를 만들어야 내가 일을 하고, 장사가 잘돼야 내가 일을 계속하지.”
그때는 그저 답답하게만 보였고, 이해되지 않았던 아빠 뜻을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바로 티가 나거나 눈에 보이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지만,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일과 일로 모여 나와 공생 관계를 이룬 다른 사람이 쏟은 정성과 시간을 귀하게 여기는 것.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금전적 거래에서 시작된 관계이지만, 통장에 찍히는 숫자 너머를 보게 된다면 그 의미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게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대화 한 번 나눈 적 없을지라도 다른 사람과 내가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가는 방식일 것이다.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줄 요약:
1. 홍보용 책(그것도 신간인데)을 파는 건 쫌 그렇지 않습니까!?
2. 출간 1년 이내의 책은 새책을 구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