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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다시 쓰기

욕심

그대 청춘이다

by 시인 손락천

조금만 더

다시 조금만 더


그렇게 희망하던 삶의 최대와 최소는

계속 바뀌었다


지천의 모든 것은 시절 따라 피고 졌는데

욕심에는 시절도, 한계도 없었다


꺾인 백살까지도

어쩌면 진짜 백살까지도




feat. 삶


# 나는 고매한 사람일 수가 없다.


진리가 무엇인가?

진리가 무엇인가를 묻기 위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렇게 진리를 탐구하고 추구하는 삶이 고매한 삶이라고 한다면, 나는 전혀 고매한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 데카르트와 칸트를 종합하면, 진리란 이런 것이다.


각설하고, 진리와 상관이 있는 것 중에 정언명령이라는 것이 있다. 처음부터 전혀 오류가 없는 명제를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언명령은 인류를 유지하는 도덕률로 포섭된다.


그러하기에 정언명령이 왜 인류에게 오류가 없는 명제인가를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진리에 대한 탐구인 것으로 이해된다.


가령, [살인하지 말라]는 것은 무엇 때문에 정언명령인 것인가? 그 이유를 탐구하다 보면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고, 그것을 고민하다 보면 모든 정언명령의 배경이 된 진리에 다다를 것이라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진리란 판단의 근거를 일컫는 것이다. 진리탐구란 무엇 때문에 사람은 보편적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정언명령으로 판단하는지를 묻는 것이고, 나아가 무엇 때문에 사람은 보편적으로 [1 + 1 = 2]라고 판단하는지를 묻는 것이라는 말이다.


즉, 이러한 물음으로써 그 판단의 근거를 소급하여 올라가면 더 이상 소급할 수 없는 근본 원인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바로 진리라는 것이다.


# 그러나 칸트가 말을 끊어버렸다.


그런데, 결국 칸트조차 근본 원인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칸트는 인류가 가진 보편적 판단 패턴에 대해서만 언급한 채, 정작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한 언급 없이, 사람을 도덕률에 옭아 메어 버린다.


말하자면, 사람은 선험적 종합판단에 따라 보편적 사고와 정언명령을 가지게 되지만, 이러한 오성 형식과 판단 형식은 그 근원을 알거나 증명할 수가 없는 것이기에, 결국 칸트는 어쩔 수 없이 [판단력 비판]이라는 명목 아래 [사람은 도덕률의 범위 내에서 선험적 종합판단을 하여야만 합목적적이고, 안정적이며, 정의롭게 사는 존재가 될 것이다]고 천명하여 버릴 수밖에 없었다.


# 실패한 철학에서 삶을 구한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실패한 철학이라고 본다.


진리를 규명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유지 방법을 제시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하기에 칸트만큼 고민할 수 없는 우리는 오늘도 그냥 이렇게 사는 것이고, 그것만으로 만족한다.


결국 사람에게 인문학의 역할이란 삶에 대하여 가능한 만큼의 고민거리를 던지어 스스로 떳떳하다고 여길 정도의 정당성을 찾게 도와주는 것이다. 결코 심화된 논리로 사람을 재단하거나 해부하여 삶의 이유는커녕 [절망]이라는 죽음의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 아닌 게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다시 내려놓으면 편할 것 같지만, 내려놓을 수가 없는, 두근두근 뛰는 욕심에 괴로워하고, 그래서 누구에게든 붙잡고 묻고 싶어진다.

나라는 사람이 사람이라는 범위 내에서 스스로 자제하여 자족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이 무엇일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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