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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다시 쓰기

꿈 같은 것

그대 청춘이다

by 시인 손락천

내 지금 이 노래에

가슴 앓은 것은

슬퍼서가 아니오


내 다만 이 노래에

쓸쓸했던 시절

그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던 까닭이오


그래서 혹

내 이제 슬픈 기색이어도

아무 일 아니니 걱정 마오


이미 흐려

잡을 수 없는 흔적에

내 잠시

머뭇거린 거요




feat. 삶


# 젠장. 기억하기 싫던 것이 보일 줄이야.


꿈속이 온통 뿌연 안개였다.

잠 깬 새벽의 이 두통이란, 아마 내가 그 꿈속에서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 꽤나 애썼음일 테다.


그래서 곰곰 생각해보니, 뿌연 안갯속에 희미하였던 그것은 옛 시절의 어렴풋한 형상이었다.


꿈속의 아이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줄곧 집에 있었고, 행동반경은 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의 묘지와 뒷산 어림이 전부였다. 산간마을의 외딴집에는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그림책도, 가지고 놀 만한 장난감이나 군것질거리도 없었다. 전기가 없던 저녁은 캄캄했고, 밝음이거나 어둠뿐인 하루는 지겨워도 그렇게 지겨울 수가 없었다.


젠장. 기억하기 싫은 것을, 그래서 잊어버렸고, 잊은 만큼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던, 그런 것이 보일 줄이야.


# 반복의 회전목마였다.


한때는 지독한 원망이었다. 만약 상황이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혼자 놀기와 혼자 지내기에 익숙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에 걸맞은 방법과 원칙을 세우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무슨 특별한 즐거움이 있었을 리 없지만 최소한 거절과 실패가 있을 수 없던 하루하루의 놀이.

아마 그것은 고매한 정신의 니체가 말한 회전목마와 같았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순환하여 마주치는 순간이지만, 그 매 순간이 본질상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는, 그래서 똑같은 순간을 반복하고야 마는 그런 회전목마 말이다.


# 그래서 니체는 초인이 되었다던가?


니체는 신이 그러한 회전목마를 탄 사람에게 그릇된 희망고문을 하였기에 결국은 그 돌아가는 회전목마에 치여 죽었고, 그 회전목마를 탄 사람 중에 반복하여 마주한 모든 순간이 결국 하나의 순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가 나타난다면 비로소 그가 초인일 것이라고 했다.


내게는 개 같은 소리다. 현란한 언어로 허무와 좌절이 사람에게 당연한 것인 양 치부해버리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그리고 그것이 그리하다는 것을 알았던 니체는 과연 초인이 되었다던가?


아닐 테지.

백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그러한 초인이 있기보다는 차라리 신이 있기가 더 쉬울 뿐이겠지.


# ‘젠장’인 이유다.


우는 것은 우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가 좋다. 소리 지르는 것도 소리 지르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가 좋다. 그러나 혼자만의 오랜 놀이에서 세운 원칙에는 그러한 상태가 결코 바람직한 상태로 상정된 적이 없고,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러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버거워한다.


우는 것과 웃는 것이, 소리 지르는 것과 소곤거리는 것이 같을 리가 없듯, 모든 순간은 등가의 같은 순간이 아니기에 재미있는 것이고, 피곤하고 갈등되는 모든 순간의 고역도 사실은 고통이나 좌절을 전제로 한 것만이 아니어서 결국에는 다른 가치의 열매를 맺는다.


알았든 몰랐든, 어쩔 수 없었든 아니든, 그래서 나의 그런 놀이는, 니체의 그런 허무는, 죽었다 깨어나도 좋은 경험이거나 재미있는 무엇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그런 놀이에 익숙해진 나는 여전히 울거나 웃는 그대로에 동화되지 못한 채 별로 재미없는 현재를 산다.


그래서.

니체에게는 어떠할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 문득의 꿈이 몹시도 ‘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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