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왜 끝나나> - 에바 일루즈
과거에는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였다. 상대방을 맞닥뜨리면 피하기보단 오랫동안 깊게 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는 ‘피할 수 없는 건 없다’라는 생각이 만연하다. 관계가 조금만 틀어지면 피해버린다. 깊은 매력을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많아졌기에, 서로 맞닥뜨렸다 피하기를 반복한다. 결국 그렇게 우리는 지속해서 비껴가기만 한다. 과거에는 마치 찹쌀 도넛의 속에 있는 ‘앙꼬’까지 맛보려고 노력했다면, 지금은 겉에 있는 설탕만 핥아먹고 버려버린다. 진짜 별미인 ‘앙꼬’따위는 맛보려고 하지 않는다. 마냥 최대한 많은 도넛의 설탕을 맛보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럴수록 서로는 자신의 ‘앙꼬’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한탄하며 외로워한다. 진정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겉에 자극적인 설탕만 축내고 버리는 형태는 쾌락주의와 같다. 그리고 그 쾌락주의에 뒷배경에는 자본주의가 있다. 자본주의와 쾌락주의는 아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모두가 하나의 도넛을 오래 맛보고 있다면, 거기서는 소비가 발생하지 않는다. 설탕만 맛보고 버리는 형태를 취해야 거기서 많은 소비가 발생한다. 돈을 들여 몸에 다시 설탕을 묻히고, 새로운 도넛을 찾으러 간다.
과거를 무조건 추앙하는 것은 아니다. 앙꼬까지 별로인 상대를 만났지만 관계를 끝내지 못해 불행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그 중간쯤을 원한다. 적어도 상대방의 ‘앙꼬’를 맛보려는 노력은 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도 나의 ‘앙꼬’를 알아봐 주고, 그렇게 서로가 인정받는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